Keith Jarrett – Gary Peacock – Jack DeJohnette : 30 – 3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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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19(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30년을 함께 했다는 3명의 남자를 3번째 만났다. 해가 진 뒤에도 아직 하늘에 남아 있는, 어스름한 빛의 잔영 같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골라 주신 음악도 한결같이 곱고 편안했다. Pt2의 두 번째 곡 “Ballad of the Sad Young Men” 예의 Pt2의 붉은 셔츠를 입으시고, 너무나 익숙한 쾰른 앨범 자켓의 그 포즈 …피아노 앞에 고개를, 온 몸을, 온 마음을 숙이고 있는 대로 웅크려, 깊은 어딘가를 홀로 들어가 끌어올린 첫 음을 건반 위에 짚어내셨을 때 온 몸에 흐르는 전율. 그리고 천천히 자렛 옹의 흔들리는 등짝을 따라 흐르던 선율은 슬픔이기도 했고, 기도이기도 했다. Shenandoah를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은 느낌. 진심으로 이 공연에 감사한다. 이 한 곡 만으로도.

생각해 보니, 늘 그랬네. 티켓 값이 싼 것도 아닌데, 항상 고맙다는 기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무슨 망언인가 싶지만. 그 분들의 공연에선 늘 내가 을 내지는 병, 정, 무가 된 듯한 기분. 돈 내도 안 팔면 못 사는 독점적 공급자이므로. 뭐든 갖다 바칠테니, 그냥 살아만 계셔다오 그리고 계속 가끔 들러서 연주 들려주세요 굽신굽신 이런 식이 되어 버린다.

Pt1의 마지막 곡. 세 영감님들에게서 들어보지 못했던 스타일이었다. 엇박자로 뚱따뚱따, 음의 전개도 이국적이고…스탠다드 넘버가 아니라, 어느 남미에서 온 선율처럼 같았는데, 셋리스트 보니 I didn’t know what time it was란다. 참 좋았다. 오래된 우물에서 전에 맛보지 못했던 차고 신선한 물이 흘러나와 익숙했던 풍경에 새롭게 눈뜨게 해 주는 것 같은.

4번째 앵콜곡, Straight, No Chaser. 옛다 이거 먹고 떨어져라??? 안 가고 보채는 아이에게 줄까 말까 감춰놓은 제일 맛있는 초코바를 던져주시듯(ㅠ), 맨 끝에서 있는대로 실력 발휘를 해 주셨다. 네네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맛나요 맛나. 이제 집에 갈께요. 아는 곡이 거의 없었는데, 따다다다~ 따다다다~따다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와 몹씨 반가웠다. 운전하며 오는 길 내내 흥얼흥얼~

언제나 앵콜로 빠뜨리시지 않는 When I Fall in Love. 수 없이 들었는데도, 집중 복습 기간이었던 지난 주에만도 Whisper Not과 Blue Note 버전을 번갈아가며 4~5번은 들은 것 같은데도, 그래도 이번의 연주는 같지않고 또 새롭다는 것에 놀란다. 익숙한 선율 속에서, 음들이 여기 저기 예측할 수 없이 일탈했다 자리잡기를 반복하는 몇 분을 귀로 따라가며 그것이 마치 지나온 삶의 궤적같다는 생각을 했고, 이 음악과 함께 한 시간들이 떠올라 뭉클뭉클했다.

솔로까지 네 번의 공연을 봤는데, 그 중에서 이번이 자렛옹의 손가락이 제일 잘 보이는 자리였다. 사실 나에게 오늘의 최고의 볼거리는 자렛옹의 손가락 그 자체였다. 우주를 떠돌던 그 많은 음악에 최종적으로 음이라는 물리적 형체를 부여한 그 손가락들.

그 오른손의 손가락이 건반이라는 우주를 날아다니는 경이로운 모습을 목격했다. 자렛 옹의 손가락이 건반에 닿을 때 마다 내 귀에 자렛 옹이 선택한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망치로 내리쳐 정확히 겨냥한 그 자리에 말뚝을 박듯이 손가락으로 건반을 찍어 누르는 것도 모자라, 내리친 지점을 다시 한 번 힘주어 좌우로 흔드는 타건에 압도되었다. 마치 음악이라는 지평에 어렵사리 내린 음을 다시 한 번 단단히 고정이라도 하려는 듯이. 이렇게 만들어진 음은 곧바로 휘발되지 않고, 제 역할을 한 후에도 길고 긴 잔음으로 남아 뒤이은 음들과 겹치고 공명하며 소리의 입체감과 깊이를 만들어 낸다.

피아니시모로 들리는 여린 음들을 치실 때 오히려 등근육을 잔뜩 긴장시켜 손가락 끝까지 힘을 전한 채,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없는 정량의 소리를 내기 위해, 알을 품은 어미새처럼 너무나 조심스레 건반을 아래로 밀어내는 손가락의 움직임. 작고 여리지만 그토록 소중한 음 하나가 태어나는 경이로운 생명 탄생의 순간을 지켜보는 듯한 순간들이었다.

때로는 손등을 피아노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때로는 둥그렇게 말아 세우기도 하시고, 때로는 깃털처럼 가볍게 쓸어내리시기도 하고, 고개를 최대한 오른쪽으로 돌려 몸을 비비 꼬아 스핀을 먹이듯 건반을 두드리시기도 하고, 머리부터 허리까지 대각선을 만든 후 어깨선에서 잔뜩 팔을 뻗쳐 그 끝에서 건반을 두드리시기도 하고, 오른발 왼발로 번갈아 장단을 맞추시고 그것도 모자라 엉덩이를 들어 흔들거리는 몸의 리듬을 건반에 실어내시기도 하고…

지난 네 번의 공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순간도 그냥 지나쳐 보내는 음은 없었다. 모든 행동은 한 음 한 음에 모두 생명을 부여하려는 한 인간의 몸짓이었다. 오늘 자렛 옹은 몇 개의 음을 치셨을까? 몇 천 개? 몇 만 개? 어쨌든 자렛 옹은 그 수 만큼의 음에 진실한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연주의 행태 뿐만 아니라, 그 결과물에 있어서도 자렛 옹의 연주는 피아노와의 섹스가 맞다. 인정, 땅땅땅. 정확히는, 피아노를 매개로 한 음악과의 접신이겠지만. 그래서일까? 아무리 봐도, 이렇게 가까이서 HD급으로 봐도 자렛 옹 나이 대비 넘 심하게 섹시하심. 누가 섹시함과 생산 능력과의 상관관계에 대해 논문 좀 써봐…자렛 옹을 샘플로 해서.

참, 또 하나의 대박!!! 중간에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피아노 현을 두드리시거나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조율에??) 자렛 옹이 어수선하게 무대 뒤를 왔다갔다 하시고 했는데, 그러다 갑자기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주 시작 전 선글래스를 벗어서 피아노에 올려 놓으셨다. 덕분에 선글래스로 가려지지 않은 자렛 옹의 오르가즘 쌩얼을 눈 앞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초레어템. 한 마디로, 색계에서 양조위의 그 표정에 못지 않다. 돌이켜 보는 것 만으로도, 심박수 급상승*.*;; 광클질에 비싼 표 앞자리 득템한 보람이 팍팍팍-

좌석 덕분에 작정하고 자렛 옹에 집중한 덕에 나머지 두 옹께는 대놓고 소홀했다. 어쩐지 연주 구성에서도 자렛옹의 비중은 더 높아진 것 같다. 드럼, 베이스 솔로가 이렇게 드물었나 싶었다. 원래 그랬나? 특히, 잭 디조넷의 드럼에서 뭔가 빠진 것 같다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다 아니고, 그저 내가 이제서야 트리오의 연주를 제대로 듣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트리오에서 *표정*을 담당하고 계신 피콕 옹. 얼굴에 간간히 떠오르던 미소가 푸근했다. 드럼 셋트에 가려 디조넷 옹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자렛 옹은 워낙 나홀로 심취가 취미이신지라, 피콕 옹의 미소가 양 쪽을 접착제처럼 이어 주어, 트리오를 완성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처음 (사진으로) 뵐 때와도 비교도 안 돼게 쪼그라드셨지만….그러고 보니, 피콕 옹에게 푸근하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날이 왔네. 예전에 사진으로만 접할 때는 독수리처럼 매섭고 날카로운 눈매로만 기억했는데. 다시금, 세월이란.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장면. 베이스 독주에서 피콕 옹이 음을 좀 다르게 비틀어 연주하자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우~”하는 탄성으로 화답했던 자렛옹. 관객 대다수가 놓쳐버렸을 미묘한 변화를 30년 지기 협연자는 간파했고, 80대 노연주자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사심없는 찬사를 날린 것이다.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서로를 감탄시킬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이 놀라웠다. 내가 기억하는 이번 연주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순간이다. 첫 번째는 마지막 커튼콜 때 세 분이 부둥켜 안으시던 모습. 30년을 같이 보내고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분들이 벅차게 서로를 얼싸 안는 모습은 그저 감동이었고, 우리의 박수와 환호성이 그 트리거가 되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일본에서는 이제 더 이상 트리오 활동을 하지 않으신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고 했다. 앵콜이 죄송스러울 정도로 연로하신 두 분을 보며 (자렛 옹은 열외~) 그럴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니, 이미 지났다는 것을 알겠는데도 여전히 이 트리오에게 안녕을 고하기가 아쉽기만 하다.

자렛 옹의 연주를 실제로 보는 것이 오랜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은 풀었고…오늘 공연 보다가 그만 새로운 소원이 생겨버렸다. 이 소원은 못 이룰 것이 백퍼 확실하다. 그래도 이미 소원이란 것이 되어 마음 속에 자리잡아 버렸으니 어떡하지? 자렛 옹이 푹 숙인 쾰른 포즈로 연주할 때 자렛 옹 귀에 들리는 소리로 연주를 듣고 싶어져 버린 것이다. 거기서 자렛 옹이 듣는 음악은 어떤 것일까. 어쩜 나는 반밖에 혹은 반의 반밖에 못 듣고 있는 지도 모른다. 거기 가야 다 들을 수 있을 것 같단 말이다. 어찌하면 이 소원을 풀 수 있을까. 구마모토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시속 260km의 신칸센 상-하행 열차가 스쳐지나가는 광경이라도 지켜봐야 하려나.

아름다운 꿈에서 깬 것 같은 느낌. 그날처럼 달빛이 쏟아지는 광화문을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봄밤 속으로 걸어들어가, 간만에 선선해진 봄바람에 치마도 날리고, 자렛옹 만나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싶었지만, 현실은 네비 언니의 말씀에 복종하며 최적이 아닌 듯한 의심스러운 경로를 따라 얌전히 귀가. 간만에 블로그 쓰며, Tribute의 Ballad of the Sad Young Men과 이어지는 All the Things We are, Blue Note의 Lament 등 오늘 연주곡들 무진장 리피트. 지난 세월 참 많이도 들었는데, 그런데도 이제서야 비로소 이 트리오에 조금은 귀가 트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2013년 한국의 5월. 희망이 소진되어 힐링으로 떡칠한 가면극같은 현실 속에서 이런 순수의 결정체를 듣고 있다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 그간의 자렛 옹 공연 감상기

2011.6.2 Keith Jarrett Solo Concert in Seoul
http://youzin.com/blog/?p=2956
꿈에 그리던 솔로 공연!!! 이 날의 한 줄 요약 ‘소용돌이치는 까만 하늘에서 고흐의 별들이 마구 떨어지는 것만 같은 황홀한 밤’.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무진장 고생했지만…5번이나 앵콜 받아주신 자렛 옹과의 교감도 너무 좋았고, 자렛 옹도 한국 팬들의 광적인 반응에 매우 즐거워하셨다는 후문.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공연 끝나고 많이 많이 걸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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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8 Keith Jarrett – Gary Peacock – Jack DeJohnette 첫 내한 공연
http://youzin.com/blog/?p=2045
눈물 콧물 질질 짜며 봤던 감동적인 무대. 그들의 등장에 왜 이리 시큰해 지던지. 광적인 한국 팬들의 반응에 즐거워하시던 세 할배…공연장에서 우연히 아는 얼굴을 많이 만나서, 더욱 즐거웠고…끝나고 을지로에 진출해 마신 한 잔의 술과 함께 했던 이들과의 열혈 간증 타임이 기억에 남는 날.

2007.5.6 Keith Jarrett – Gary Peacock – Jack DeJohnette 일본 도쿄 우에노 동경 문화센터 공연
http://www.youzin.com/photo/?p=26
한국에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일본으로 날라가 본 첫 번째 트리오 공연. 인터미션때 와인까지 한 잔 마시고 알딸딸해 져서~ 두 배로 꿈결같았던 시간. 술기운에 동영상 촬영까 감행. 지금 생각해 보면,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지대로 민폐. 부끄부끄…그래도 영상에 찍힌 God Bless the Child의 도입부를 지금도 간간히 들으며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잠 못 드는 밤에

손을 내밀면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깨끗하고 거짓없는 목소리.
마음은 어느새 무거운 빗장을 풀고, 순순히 문을 연다

잠 못 들고 이런 노래까지 부르는 걸 보니 많이 힘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니 맘도 힘들었을 것 같다며, 외려 돌아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따스함에 …응 알고 있었어? 알았던 거지??

핸드폰 속에서 노래 부르는 낯선 남자에게 묻고 또 묻고. 뭘 확인하려는건가. 확인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그냥 그렇게 계속 묻고만 있다.

그런 건 한 때지…We were in love.
love, love, love.

비 내리는 잠 못 드는 밤.

Night Guard

깊어가는 밤이었다. 캄캄한 밤이었다. 난 버스를 타기 위해 인적이 드문 서울 외곽의 2차선을 따라 거꾸로 걷고 있었다. 가끔씩 빠른 속도로 차들의 불빛이 다가왔다가 옆으로 지나갔다. 가끔씩 성마른 클랙션이 울리기도 했다. 불탄다는 금요일이었지만, 취해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일주일의 그 어느 날보다 명료했다. 밤하늘에 빛나는 새하얀 점같은 별의 수를 세기도 했다. 누군가 크게 한 입 베어문 것 같은 달은 유난히 낮은 곳에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몇 백 미터나 남았으려나. 정류장까지는. 버스가 무거운 엉덩이를 돌려 자신이 달려온 방향으로 다시 머리를 트는 곳. 그 때였다. 주유소의 녀석을 보게 된 것은.

새카만 놈이었다.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침침한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고 마당 너머의 어둠 속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네 다리를 꼿꼿이 받치고 서서. 멀리서였지만, 방해하기 힘든 집중의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멀찍이서 그런 녀석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이윽고, 녀석은 뒷다리를 내리고 낮춰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한 시선은 풀지 않은 채였다.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지만, 그 끝엔 밤의 2차선을 건너온 정적만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이유를 밝히지 못한 채로, 나는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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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역할은 분명해 보였다. 재롱을 떤다든지, 외로움을 달랜다든지, 누군가의 침대맡을 차지하며 독수공방을 함께 할 반려의 목적은 아니다. 이런 인적 드문 밤의 주유소에서 녀석은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의 방어라는 명백한 필요에 의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녀석을 지켜 본 짧은 시간, 녀석은 충실하게 그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만약 네가 보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면 어떡하지. 그 침착하고 묵직한 눈빛으로 한없이 無를 스캐닝하고 있을 뿐이라면 어떡하지. 지금 너의 성실함의 결과가 고작 얼마 남아있지 않은 잔여의 에너지를 무용하게 고갈시켜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지금 매우 성실하게 바라보고 있는 네가 실상은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이라면.

주말 내내 녀석의 모습이 게으른 사고의 흐름 속에서 어둠 속 플래시처럼 터졌다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거기에는 나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기계와도 같은 고독한 성실함이 있었다. 일단 가동되면 멈추지도 의심도 하지 않는. 이런 시선의 끝에 서 본 적이 있습니까. 그건 정말 기가 막히게 멋진 느낌이죠.

1Q84 – 하루키의 대작에 임하여

1Q84

3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나도 모르게 짐승의 신음 비슷한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끄어어어….끄어어어…하루끼씨…”

정말 오랫만에 집중해서, ‘장편 소설’이란 걸 읽었다. 연말과 연초의 잉여로운 시간들을 바쳐. 한 해를 마무리할 호젓한 돌이킴의 시간도, 나름 한 해의 top 10을 뽑아보던 관례도, 지인들에게 보낼 인사 메시지도 제끼고 각기 700페이지 내외를 육박하는 세 권의 1Q84 세상에 매립되어 현실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한 해를 여는 재야의 종소리가 울리던 그 순간에도, 난 마치 우시카와라도 된 양 교차되는 덴고와 아오야메를 일거수 일투족 스토킹하며, 그들과 함께 두 개의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열광은 신년의 해가 밝아 2권이 중반을 넘기고, 신비로운 소녀를 인터페이스로한 텔레딜도닉스(달리 무어라 표현하겠는가!)의 클라이맥스가 지난 후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점점 잦아들었다.

새로이 우시카와 편이 합류한 3편은 이건 아니겠지, 이건 아닐꺼야….여러 개의 설마들이 챕터의 끝마다 줄을 서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다음 챕터를 이어 받았다. 넘겨도 넘겨도 설마들은 줄은 길어져만 갔고, 난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야들여야 하는 지에 대해 혼란에 빠진 채로, 3편 후반 대부분 페이지를 넘겨야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아주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어낸 소설의 예상했던 헛헛한 마무리에 멘탈에 금이 가버리고 만 거다. 부디, 이런 소설이 아니기를 바랬다.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바랬듯이.

1Q84라는 설정은 절묘하다. 하루키는 거대한 세계를 만들었다.

한 줄 한 줄 질 좋은 실을 뽑아, 섬세하게 잇고 겹쳐 옷감을 짜내듯 고급스런 비유들을 이어 문장을 만들고, 문장들이 모여 믿을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믿을 수 있도록 표현해 낸다. 마치 허공 속에서 실을 뽑는 소설 속 공기 번데기와 같은 문장들. 챕터 1 야냐체크의 신포니에타가 흐르는 앞뒤로 꽉 막힌 수도 고속도로에서 난 이미 1Q84행 버스에 올라타 있었다.

가장 신선했던 것은 이 새로운 세계가 현실계와 완전히 분리된 미지의 영역이 아닌, 이 세계에 교묘하게 병행하면서도 미묘하게 틀어져 있는 겹쳐진 세계라는 점이다.

1Q84는 토끼의 인도를 따라 간 앨리스가 나무 구멍으로 들어가 만난 이상한 나라, 회오리 바람에 집과 함께 휩쓸려가 도착하게 된 오즈라는 미지의 세상, 옷장을 열었을 때 펼쳐지는 판타지 나디아가 아니다. 수도 고속도로의 비상계단을 내려갔을 때, 도쿄의 도심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똑같이 펼쳐져 있다. 너무나 똑같아서, 주인공들조차 자신이 이상한 나라로 이동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헨젤과 그레텔에게 남겨진 작은 과자 조각처럼 던져지는 작은 단서들을 통해서 이 세계가 변질되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갈 뿐.

멋진 설정이다. 변함없는 현실 속에 있지만 현실과는 다른 또 다른 세계가 겹쳐져 있다는 것. 그 겹쳐진 세계를 정상인 세계의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세계를 헤쳐나간다는 것. 아오마메를 내려준 택시기사는 경고한다. “현실은 언제든 단 하나 밖에 없어요” 하지만, 1Q84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직접 찾아내야 한다. 바늘로 찌르면 붉은 피가 나는지 스스로 확인해 가면서. 그리고, 하루키의 성실한 문장은 그 이상한 세계를 무리없이 납득하게 한다. 두 개의 달이 뜨고, 리틀 피플들이 날뛰며 공기 번데기를 지어내는 기묘한 세계를.

예상을 비트는 드라마틱한 전개, 하루키의 새로운 모습을 보다.

그러고 보니 하루키의 장편을 많이 읽지는 않았구나. 그래도, 그 어떤 전작에 이렇게 흥미진진한 전개가 있었을까 싶다. 재미만점의 영화 곳곳에 포진된 반전들처럼, 자극적인 상황들이 총알처럼 날라와 아드레날린 폭탄을 터트린다. 특히, 1편에서 덴고가 공기번데기의 개작에 참여하게 되기까지의 전개와 아오야메와 노부인의 은밀한 동맹의 과정. 그리고 선구의 역사와 산산조각난 다마루의 셰퍼드, 사라진 츠바사까지…숨쉴틈 없는 사건사고들이 이야기에 몰입시키며, 진행되는 상황들의 배경과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든다.

하루키하면 항상, 옅은 회색톤이 드리워져 있지만,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조용히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뭔가를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선을 따르는 분위기 있는 전개를 떠올렸다. 극적인 반전이나 숨막히는 전개, 허를 찌르는 답변을 휘두르며 상황을 쥐락펴락하는 인물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런데, 1Q84에서는 오히려 이런 흥미진진을 프로페셔널하게 구사하는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하루키를 봤다. 울퉁불퉁 격한 이야기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시 이어 붙여가며,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솜씨가 대단하다. 1권과 2권의 중반까지는 계속 그랬고, 후반에서는 특히 고양이 마을의 젊은 간호사가 공기 번데기의 도터를 언급하는 장면(3. 208p)의 기묘한 섬뜩함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오감을 자극하는 비유의 향연. 작가수업으로 참고해도 좋을 만한 비유의 총망라. 하지만…

한밤중의 악마처럼 뜨겁고 진한 커피가 그녀의 취향이다. (1-180p)
고마쓰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열리는 일 없는 서랍의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낸 듯한 웃음이었다. (1-39p)
지나치게 가까워져서 자칫 깊숙하게 엮인 참에 발밑의 사다리를 쓰윽 가져가버린다면 그건 정말 못 견딜 일이다. (1-369p)

소파에 자리를 잡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내장이 뽑혀나간 생물의 한숨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2-169p)
다마루는 잠시 침묵했다.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운 침묵이었다. (2-72p)
덴고는 손 안에 남겨진 죽은 수화기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농부가 해가 쨍쨍한 날에 타들어간 야채를 집어들고 바라보듯이. (2-168p)

그의 묘사력은 극에 달한 것 같다. 최고의 해상력이다. 오즈나 나디아같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라면 오히려 쉬울 것이다. 하지만, 겉모습은 현실계와 동일한데 동시에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되어 버린 세계의 미묘한 차이를 눈에 베일듯 예리하게 그려내어 믿게 한다는 것.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도전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 도전은 성공했다.

변함없는 그의 장기. 이 샘솟는 비유들은 대체 어디서 튀어오는 것일까? 이 수 천 페이지를 어쩌면 이렇게 한결같이 그토록 다채롭고도 적확한 비유로 채워낼 수 있단 말인가. 하루키씨를 위한 별도의 비유 수집팀이라도 가동되는 것인가. 밤마다 비유 요정들이 나타나 낮동안 긁어모은 비유 꾸러미라도 던져주고 가는 것인가. 이 책은, 소설로서의 가치와 별개로 작가 지망생을 위한 비유법 사전, 비유법 레퍼런스로 사용되어야 할 것 같다.

거듭 감탄한다…또 감탄한다. 하지만 이윽고 무감해지고, 나중에가서는 심지어 피곤해진다. 과함때문이다. 굳이 비유를 쓰지 않고 담백하게 넘어가도 좋을 것 같은 상황까지도 굳이 장식을 달고 마는 그의 한없는 성실함? 완벽주의? 넘치는 재능? 때문이다. 때로는 몰입에 흐름이 깨지는 느낌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소설의 상황과 비유를 순환해야 하는 인지적 피곤함도 누적되었다.

예컨대, 우시카와의 이상한 생김을 이해하기 위해서, 갑자기 설탕항아리 속의 지네까지 순간 이동해 갔다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인지의 일탈이 하루키 소설을 읽는 고유한 재미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가 무뎌질 때 쏟아지는 비유는 오히려 인지의 교란이 되고 만다. 극의 전개가 덤덤해져가는 3권에서는, 마음 속으로 여러 번 *감히* 하루키씨의 빨간 펜 선생님이 되는 것을 상상했을 정도다. 이런 부분은 쫌 그냥 넘어가자구요… 응?? 자꾸 그러면 왠지 신의 물방울스러워진단 말이예요.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처럼 말한다. 그리고, 모두 다 지나치게 촉이 좋다. 아무도 틀리지 않는다.

노부인의 집을 지키는 시큐리티는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한다. “직감에 대해 나는 경의를 표하지…하지만 일단 자아가 이 세계에 태어난다면, 윤리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어.” (3-275p) 치매 아버지가 입원한 시골 병원의 담당 의사는 아버지의 증세를 이렇게 진단한다. “급격하달 건 없지만, 방금 말한 대로 생명력의 수위는 조금씩, 하지만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어요. 마치 열차가 조금씩 속도를 늦추며 정지를 향할 때처럼.” (2-536p)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간호사는 언어는 이렇다. “얼굴이 무척 편안했어. 뭐랄까. 가을 끝 무렵에 바람도 없는데 나뭇잎이 한 장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 (3-522p)

안전담당 어깨의 비트겐슈타인과 저 캐캐묵은 시골 의사와 간호사의 고급 비유라…뭔가 어색하다. 소설 속 인물들이 다들 이런 식이다. 모두들 지나치게 세련된 언어를 쓴다. 뭔가를 표현할 때는 비유를 달기 좋아하는 비유법의 달인들이다. 각자의 삶의 이력을 가지고 그 이력에서 만들어진 자신만의 언어로 발화하는 개별적 존재라기 보다는, 꼭 한 사람의 여러 버전처럼 느껴진단 말이다.

아오마메가 천신만고 끝에 조우하게 된 리더의 언어도 그렇다. 그 미스테리한 베일 뒤의 리더 마저도 등장하자마자 주저리 주저리 아오마메를 분석한다. 물론, 당연히 현란한 비유의 향연을 펼치며. “…정확히 말하자면 가톨릭 교회는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자네도 마찬가지야. 지금까지 오랫동안 몸에 걸쳐온 단단한 방어의 갑옷을 벗어던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 지나치게 많은 말과 말 속의 깨알같은 비유들. 그렇다고 언어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리더에게 기대했던 압도적인 존재감은 희석된다. 더불어, 이야기의 핵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리더가 자아냈던 긴장감도 함께. 최소한 리더란 사람은 저런 수도꼭지는 아니어야 하지 않아! 당최 없어보여서… ㅠ

게다가 등장 인물들 모두 촉이 어찌나들 좋은신지. 별 구체적 정황이 없음에도 아오야메와 덴고는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그가 다시 나타날 것을 믿고, 그도 1Q84에 있음을 느끼고, 그를 다시 찾게 될 것을 안다. 다마루는 우시키와를 추리해 내고, 우시키와 역시 덴고와 아오마메의 정황을 짚어낸다. 그 외에 여러 가지 것들을 여러 사람들이 다 미리 알거나 예감한다.

이들에겐 쉬운 일이다.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우연히도 그냥 그렇다는 느낌이 그냥 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해 내고, 이런 상상은 어긋나는 법이 없다. 그리고 다들 그 전제가 어긋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행동한다. 모두가 미래를 비추는 수정 구슬 하나라도 숨겨놓고 있는 듯,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아예 예지 능력을 사전 탑재한 후카에리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저기서 너도 나도 모두 다 같이 번득이는 오컴의 면도날은 맨밥에 들이붓는 맹물처럼 이야기를 싱겁게 만든다.

리틀 피플은 위협적이지 않다.

호이호이를 외치며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와 공기에서 실을 뽑는 리틀 피플은 여지없이 <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움파룸파족을 떠올리게 한다. 위험하다기 보다는, 귀엽고 깜찍해 보인다. 그들에게 위협과 추격을 당하는 이들의 긴장과 공포는 그토록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정작 공포의 핵심인 그들은 존재감 희미하다.

하나이며 거대한 지배자인 빅 브라더의 대립항으로 우리의 일상에 물처럼 스며들어 지배하는 작은 존재들인 리틀 피플은 개념적으로는 흥미롭지만, 그들이 선구를 접수하고 그 모든 위험한 사건들의 배후라는 것은 어쩐지 연결이 안된다. 오히려 소설에 등장하기 전, 공기 번데기라는 소설의 등장 인물 상태로, 상상의 베일 뒤에 숨어있는 리틀 피플이 더 신비롭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리틀 피플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잘 보지 못했던 ‘명백히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된다. 이 적을 향해 아오야메와 덴고, 후카에리 등은 자신이 가진 것을 총동원해 맞서 싸운다. 물론 그 실체가 알고 보니, 그다지 일방적으로 나무랄 수만은 없는 상대적 악이었다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악의 악성은 그려져야 하지 않은가. 리더를 움직이고, 그 많은 이들을 덜덜덜 떨게 하는 악의 발현 과정도. 나에게 리틀 피플은 선구나 그 외 어떤 사건과도 무관한, 그저 어딘가 동떨어져 공기 인형을 자아내는 동화 속 일곱 난장이처럼 느껴져서 실패였다.

운명적 첫 사랑의 신화

이게 3부에서 가장 나를 괴롭혔던 부분인데…뭐 다 그렇다 치고. 다른 건 뭐 넘어갈 수 있다 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과 접신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2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장대한 소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놀라운 비유의 향연도, 1Q84라는 세계의 조성도, 자신의 한계를 끌어안고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있는 인물들도 모두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것은 운명적 첫사랑, 그리고 그 사람과의 절대적 교감에 대한 믿음이다. 아오야메와 덴고. 이런 저런 사정들이 있었으나, 초딩 때 교실에서 손 한 번 잡은 것 만으로 낙인찍혀 이후의 인생이 결정되고, 다른 사랑 따윈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굳이 찾으려 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항시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언젠가 운명처럼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라. 1Q84는 결국 그 둘을 다시 만나게 하기 위한 거대한 장치같은 것에 불과했다는 느낌이 들만큼, 소설은 이 오그라드는 전제를 근간에 두고 있다.

근데, 이게 믿기냐? 솔직히 이거 너무 향그러운 순정만화틱하지 않냐고. 근데 이걸 안 받아들이면, 이 소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어찌보면, 그냥 거대한 비유법 사전이야. 근데 난 못 믿겠다고… 제발 이게 아니라고 말해줘. 이런 대작의 스케일에 걸맞는 인간과 삶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이 있다고 말해줘.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니어도 좋지만, 분량으로만 치면 까라마조프에 맞먹지 않냐며 나는 울부짖는다.

그게 아니라면, 난 뭐한 거냐고. 그 귀한 연말과 연초를 바쳐 난 뭘 읽은 거냐고. 질문은 그저 책갈피 사이 언어의 계곡을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었고, 이윽고 밀려오는 허무함에 그만 난 책장을 덮고 짐승의 신음 소리를 내게 되고야 만 것이다.

소설 속 문장처럼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시간에 하나의 장소에만 존재하는데. 그것을 심지어 아인슈타인이 증명했다는데. 나의 시간과 장소는 무엇을 위해 바쳐진 거냐며. 일본 소설 읽을 때마다 귀결되고마는 ‘펀더멘탈이 안 따르는 과도한 장식의 헛헛함’을 남도 아닌 하루키에게서 느낄 줄이야. 아휴…얼마만에 읽은 기나긴 소설인데. 물론 1권~ 2권 반까지의 오버도스만으로도 책값은 넘치게 뽑았다지만.

하루키씨 4권을 쓰고 있다는 썰이 있던데, 읽게 될지 모르겠다. 읽게 되겠지. ㅠㅠ난 하루키 호갱님이니깐요! …라고 하기엔 지난 날 하루끼 서비스는 참으로 훌륭했다. 1Q84도 이상한 소설은 아니고. 하루키의 대작이라는 점에 너무 기대가 높았던 거지. 1권 456p 노부인의 DNA론같은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간간히 이런 사고를 접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보석같은 시간이었는데. 여하간 나이든 여자란 뭘 갖다 바쳐도 피곤하게 구는 법이다. 내가 날 서빙해도, 내 비위는 못 맞추겠다…라는 요상한 결론으로 ㅋㅋㅋ

잊혀지지 않는 문장이 있다. 2권에 나오는 치매 아버지의 대사. 비유법 같은 것 없는 직구여서 더욱 깊게 꽂힌다. “설명을 안 해주면 그걸 모른다는 건, 말하자면 아무리 설명해줘도 모른다는 거야.” 알겠니? 이 빙신아. < - 단 일곱 자를 덧붙여, 이 멋진 문장을 이토록 저질스럽게 승화시킬 수도 있다는 거. 하루키상, 스미마셍! ㅎㅎㅎㅎㅎㅎㅎ

물론, 나에게 하루키씨의 가장 매력적인 컨텐츠는 하루키씨 그 자체다. 그래서, 나에겐 거대한 1Q84보다는 잡스러운 < 하루키 잡문집>이 여전히 가장 좋다.

잊지 못할 첫사랑 따위,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달을 보며 그리워 하고 있다는 것 따위! 그 달이 하나든 두 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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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1박 2일

떠나려고 했는데, 미리 떠난 선배가 있어서 차려놓은 밥상에 밥숟가락 얹듯 합류했다.

홍천이래서, 고속버스 1시간 거리로 당일치기 여행으로 예상했는데
동서울에서 최종 확인한 시외버스 3시간 거리의 상남.
최종 목적지는 거기에서도 40여분 차를 타고 더 들어가는 홍천 내면 살둔산장이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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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이 깊은 산중…불빛만이 깜박이고.
밥 먹으러 차 타고 산 넘어 30여분을 달린다.
송어회와 능이불백, 그리고 맑고 단 강원도 山 소주 몇 병으로 떼운 저녁.

산장에는 아무도 없고, 우리 일행 뿐.
나무로 불을 떼우느라, 선배들은 시간마다 마음 졸이며 왔다리 갔다리~

배상면주가 공장에서 사온 오매라퍽을 깼는데,
꼬냑도 아닌 것이 전통주도 아닌 것이 애매하게 달달한 것이 맛났다.

취하다 먹다 깨다 이야기하다.
새벽 4시에 비몽사몽 돼지고기 김치구이에 햇반을 데워 먹으며
우리가 겪은 일들과 앞으로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앞뒤없는 썰을 풀어내는 하루밤.

하기싫은 말, 하고 싶은 말…문득문득 북받쳐 오르는 감정들.
이겼다면 안 해도 됐을 고민과 모색들이 밤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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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시 팅팅 일어나 창호지 문 열어보니
밖은 온통 눈밭이다.

달디 단 오지의 찬 공기가 폐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밤새 뗀 나무덕에 바닥은 등짝은 설설 끓어
보양 황토방 숯가마 분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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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틀 사이로 아침 햇살…나무 군불 태우는 연기
밤새 창틈 사이로 나무 태우는 냄새가 기분 좋았다. 맡고 있으면 몸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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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 눈 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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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엔 고드름…갑자기 추워진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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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둔산장. 30년된 통나무 황토집. 사찰, 일본식 건축, 전통 귀틀집의 형태가 혼합된 건축물로
한국의 100대 살고싶은 집에 선정되기도 했다나. < 시인의 오지 기행> 첫 장에 소개되기도 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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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된 윤두선(전 대학산악인연맹 회장)씨가 백담사에서 기거하다 우연히 살둔마을을 들른 후
살둔에서 살고 싶어 직접 지었다고 한다.

근처에는 유일하게 북쪽으로 흐른다는 내린천이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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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둔 동네에는 사람들. 아침부터 장작 패기에 여념이 없으시다.
쫙쫙 장작 가르는 소리가 고요한 산골 마을의 차가운 공기를 가른다.
나무패는 남자라니…쫌 멋있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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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강아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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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와 칼. 나무패는 기구들. 크게 나무를 잘라 하루에 한 두 번만 불을 넣어주면 끄떡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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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로 한겹 둘러놓은 살둔 마을의 겨울나기. 이 황량한 곳에서 어떻게 사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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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증을 뒤로하고, 아침 먹으러 출발. 그런데 식당 대신 구룡령 정상으로. 해발 101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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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000m 에서 바라보는 겹겹의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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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누구의 오름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산세…

겨울산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참 오랜만에 본다.

근데 망원으로 풍경찍으려니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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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에 매달린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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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가는 길. 유진이는 차를 멈추고 열심히 진사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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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찍다 보니 배고픔에 가까운 산장에서 모두부와 더덕정식, 산채정식, 굴비 정식 섞어먹고.
동동주도 한 잔~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며 찾아간 곳은 양양의 < 휴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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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바다가 보였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세로 바다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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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즐겁게 포즈를 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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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추억이 될 닭살V를 그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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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깊은 생각에 추운 줄도 모르고, 꼼짝도 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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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파도는 몰아친다. 무섭게 달려와 파도를 내리치고 잔결로 해변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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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진득한 우유 크림같다.
커피 위를 덮은 생크림처럼 바다를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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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거센 파도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기가 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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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말이 터진다. 새하얀 포말이 산산히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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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아…이건 주진우의 말인데.
주진우 어디로 갔으려나. 정말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이제는 파도를 타는 대신, 파도를 맞는 대신, 파도를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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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로운 해변에 닿을 때까지 열심히 배를 저어 새로운 세상으로 가야 한다.
저쪽 해변…조용하고 아무도 모르는 그런 해변에 닿을 때까지.
부디 거기서 편안하길 바란다. 조용히…뭘 하려고 하는 대신 편히 쉴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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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기도할께요.
휴휴암에서는 나는 기도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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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겨울 바다와 맞서고 난 후,,, 따뜻한 커피 한 잔.
카페 <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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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셨던 원조고독지기는 돌아가시고,
사모님이 카페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계신다.
살아계실 때는 오디오에 관심이 많으셔서, 직접 오디오를 제작하여 틀어놓곤 하셨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마음으로 카페를 만드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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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오밀조밀 예쁘게 꾸며져있고, 홀리데이 같은 옛날 팝송이 연이어 흘러나온다.
시간을 거슬러 저 먼 70년대, 80년대로 돌아간 느낌. 응답하라, 그 시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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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 예쁜 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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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용을 잃은 겨울 선풍기도 제법 무시당하지 않고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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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이 직접 내려주신 커피…내내 추위에 달달 떨었는데
뜨근한 커피 한 잔이 목으로 스스륵 넘어갔다. 꾸벅꾸벅 졸음이 왔지만…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선배들 사진이라 못 올리는 게 좀 아쉬운데 그래도 한 두개만 올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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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의 대결 ! 한진사 장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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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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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보니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어가려 하고 있었다.
난 어쩐지 다 보내버린 기분이지만.

2012.12.8 광화문 스케치

여긴 내 고향이다.
그냥 ‘서울’쯤으로 테두리쳐진 막연한 도시명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

고향을 전라도, 경상도라 할 수 없듯이 나도 내 고향이라고 하면
서울이 아니라 광화문이라고 해야 한다.

본적은 신문로 1가. 이 동네는 내 놀이터였다.
동화면세점이 들어선 국제극장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며 그렇게 놀았다.
가끔은 아빠와 친한 동네 아저씨들이 뒷문으로 극장에 들여보내 주곤 하셨다. ET도 그렇게 봤었다.

그래봤자, 이제는 신림동에 생활의 터를 잡고
신림동과 분당을 쳇바퀴처럼 오가는 라이프가 틀에 박혔는데.

최근 몇 년, 별 연고없는 내 고향 동네를 찍어야 할 일이 부쩍 많았다.
다들 겪어낸 일들이다.

오늘, 오래 간만에 광화문을 향하며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집회를 시작할 땐 가을이었는데, 국회에서 11월쯤 국회에서 FTA 날치기 통과가 됐고, 힘든 겨울이 되었다.

너무 추워서 오리털 잠바안에 다시 두툼한 털조끼를 껴입고 다녔었다. 배낭에 방석과 촛불을 들고.
집회를 마치고 나면 온 몸이 얼고, 턱까지 덜덜덜 떨렸었다.
선배가 차끌고 데리러 와서, 대성집 도가니탕을 먹으러 갔던 기억. 뜨근한 국물이 죽여줬는데.
근데, 나 그때 이미 고기 안 먹고 있을땐데…음. 국물만 먹었나? 알쏭달쏭…어쨌든 궁물은 너무..눈물찔끔나게. ㅋㅋ

다들 그렇게 애썼는데, 건진 게 없다.
미국 소고기, FTA, 봉도사 구속… 어떤 것도 막지 못했다. 심지어 4.11 새누리당 과반도 막지 못했다.

망설였다. 갈까…말까…

패배주의때문이 아니다. 이런 행위들의 무용론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보는 경기는 꼭 져. 그러니까, 오늘은 보지 않겠어.
왜냐하면, 오늘은 꼭 이겨야 하는 경기니까. 그동안 다 졌더라도 오늘만은 꼭 이겨야 하니까.
이런 말도 안되는 논리에 스스로 설득당해, 차마 경기장안에 들어서지 못하는 절박한 아스날빠의 심정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갔다.

2002년 12월. 신림동에서 만났던 노무현이라는 뜨거웠던 사람.
오늘이 시큰했던 그 날의 기억과 하나로 겹쳐지길 바라면서.

참으로 조심스레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내 고향 광화문으로 갔다.

오늘이 터닝 포인트가 되어줄까? 제발…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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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앞. 이른시간 부터 꽉 채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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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짱. 조국 교수님의 지원 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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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에 돌아가는 노란 바람개비. 시대의 칼바람도 참 매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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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허들링. 춥지만 춥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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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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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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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은 것들, 기쁜 기억으로 남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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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분식 포장마차마다 그득그득.
다들 추웠던 게다. 춥지 않아서, 버틴 건 아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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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바가 유난히 뜨셔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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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앞에서 이어지고 있는 쌍차 농성장. 뜨끔한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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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안에 삶이 있다. 어떤 삶일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이 추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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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크리스마스였으면 좋겠다.
하얀 눈 대신, 기쁜 소식들이 펑펑 쏟아지는 크리스마스.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잔뜩 가져다 풀어놔주시는 크리스마스. 요즘 서울 시장님처럼.

그래서 힘들었던 마음들을 다 덮어줬으면 좋겠다. 하얀 이불이 되어 따스하게 감싸줬으면 좋겠다.
추웠던 5년의 겨울을 버틴 사람들이 더 이상 춥지 않도록.

떨리는 마음으로 19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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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 북큐슈 여행

주말을 낀 가벼운 제주 여행을 알아보던 나.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정신을 차려보니 김포가 아닌 인천 공항에 와 있었고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어디에 붙어있는 지조차 몰랐던. 후쿠오카행 항공권을 들고 있었다.

공부할 시간도 없었지만, 굳이 계획을 많이 짜지도 않았다.

3년 전 홋카이도 여행의 기억 때문인데.

꼼꼼히 검색하고, 비교와 고심끝에 숙소를 정하고, 맛집과 스팟을 연결하는 경로를 시간 단위로 엑셀에 입력하고,
심지어 구글 스트리트 뷰를 이용해 모의주행 급으로 진행 노선을 실사 확인했던 나머지
정작 삿포로에 도착했을 때 여행에 대한 감흥이 푹 꺼져버렸던 기억.

뭐야. 사진으로 본 것을 눈으로 보고, 짜여져 있는 경로를 실행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냐.

백설의 장관 대신 눈 녹은 구정물이 신발창 아래 질척거리던 거리와 그 때 그 기분이 절묘하게 어울렸었다.
결국 인쇄해 온 엑셀을 던져 버리고서야, 비로소 ‘旅行’ 나그네로 쏘다닐 수 있었음이다.
일정으로부터의 해방! 1달간 리소스를 투입한 계획로부터의 독립선언 ~ -_-;;

이번엔 가볍게 갔다. 캐리어도 없이, 쬐끄만 등산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일본 입국할 때 세관 직원이 수하물 찾는 거 잊어버린 아니냐고 묻는 것을, 쿨하게 미소지으며 패스.
하지만 정해진 건, 겨우 잡은 숙소와 산큐 북큐슈 패스 뿐. 일어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내가 불안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이게 왠 일. 곳곳에서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주던 사람들.
꽉 조인 렌즈로 찍어낸 듯, 한 점 티없이 맑았던 모모치 해변과 말도 안 통하는 아이의 손에 이끌려 간 동네 크레페 가게.
황량한 들판 너머로 해가 밀려가던 세노모토 고원, 힘차게 뛰던 비현실적인 말과 폐허가 된 horse cafe…

만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만나게 될 때의 유쾌함.
나를 위해서 뭔가가 미리 계획되어 있다고 느낄 때 온몸으로 발산되는 근자감.

한국에 돌아오고, SD카드가 고장났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정말, 참 좋았다! -_-;;
돌연 상황은 호러로 변신하고, 그 고장난 SD 카드에서 간신히 구해낸 몇 컷들. 완전 소중.
죄다 뒤죽박죽이 되어 정리하느라 애먹었음.

[2012.11] 큐슈 여행 (1) 후쿠오카

[2012.11] 큐슈 여행 (2) 유후인

[2012.11] 큐슈 여행 (3) 세노모토 고원/쿠로가와

[2012.11] 큐슈 여행 (4) 후쿠오카 다이묘

[2012.11] 큐슈 여행 (1) 후쿠오카

1년 만의 인천공항…이유는 묻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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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공항 -> 하카타 역까지 직행 버스 타고 고고씽. 일루미네이션이 가득했다.

준비한 것이라곤 달랑 숙소까지의 약도를 캡쳐해 아이폰에 담아온 사진 한 장.
참 대책 없었지만, 공항에서 같은 처지의 혼자 여행 온 언니를 만났고, 심지어 숙소도 비슷한 곳에 있다.

길잡이 역할을 해 준 언니의 숙소에서는 혼자 여행 온 28세 아가씨를 만난다.
세 여자는 반가움에 저녁의 후쿠오카를 함께 돌아다니고, 쇼핑을 하고, 술을 마신다.

블로그 따위에는 소개되지 않는, 후쿠오카 사람들의 작지만 정감가는 선술집에서.
계란과 감자를 섞어 튀겨낸 이름모를 하지만 맛좋은 튀김 안주에 삿포로 드래프트를 기울이며.

두 분의 사연이 예사롭지 않다.
빈 맥주잔이 쌓이고, 감정이 교배되며 자가 폭로의 수위가 높아지며 점차 혼미한 여행자들의 밤.

물론, 아침은 또 다른 세계입니다만. 그런 밤도 있기 마련.
감정적 원나잇 스탠드라고 해야 할까나. 이후 전개되는 양상도 비슷하고 말이다.

다음 날 눈을 뜨고 우동 한 그릇으로 해장하고
아무 계획이 없는바, 무작정 제일 만만한 버스센터로 가 보니, 후쿠오카 그린 버스라는 것이 있댄다.
후쿠오카에 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주요 스팟을 도는 순환버스. 심지어 산큐 패스로 탑승 가능.

아싸. 나처럼 준비없는 여행자에겐 딱이다.
아무 생각 안 하고 무조건 제일 먼, 맨 마지막 정거장까지 고고씽하는 걸로. 거기가 바로 모모치 해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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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 티끌없는 환상적인 날씨. 솔솔 불어오는 바람. 마리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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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미 아오키. 16살.
대략 해변까지 가는 길을 물어봤을 뿐인데, 손을 잡아 끌고 근처를 가이드해 준다.
펼쳐진 해변이 너무 좋아 둘이 손잡고 함께 깡총깡총 뛰어 다니며
근처에서 제일 맛있다는 크레페 가게에 가서 생딸기 크레페도 냠냠하고.

그래도 그렇지 다 큰 어른(?)이 어린 학생의 시간을 이렇게 잡아먹어도 되나 싶어
이래도 되냐 자꾸 물어도, 공부하러 도서관 왔는데 레스또 타임(rest time)이라며 오케이 오케이만 연발.
심지어 자기가 아는 한국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시켜 준다.
졸지에 후쿠오카 사시는 알 수 없는 젊은 한국 남자분과 어색한 통화까지…

아 네…한국 분이세요? 뭐 도와드릴 거 없나요? 아 네..그냥 아오키한테 너무 고맙다고 말해줄래요?
영어에 잘 못하는 처음 보는 일본인과 영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 어색했던 모국어 대화. -_-

서울 인구의 1/10 수준. 크기는 반.
큐슈에서 제일 큰 도시라고 해도, 시골 냄새 사람 냄새 풀풀 나는 후쿠오카였다.

어디서나 길을 물어보면, 대부분 도착지 혹은 근처까지 데리고 가 준다.
그렇게 하는 당연한 것인듯, 너무 자연스럽다.

뭐 이런 인간들이 있나.
나란 사람, 고작 이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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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리 공원

아오키와 헤어져 이리저리 쏘다니다 또 길을 잃자마자
어떤 외진 버스 정류장에 간신히 도착해 남/녀 커플이 있길래,
그린버스맵에서 본 만만한 오호리 공원 가는 버스가 있냐고 물었는데…이게 왠걸. 자기들도 거기 가는 길이라며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오늘 자기들이 가이드가 되어 주겠단다.

그닥 도움의 손길같은 걸 바라는 눈빛을 쏜 건 아니었는데.
나도 눈치가 있지, 여기까지 와서 남의 데이트 방해꾼이 되고 싶지는 않은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이미 나를 데리고 다닐 작정일 뿐이었던거고
그렇게 이끌리다시피 도착한 오호리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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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가 다소 복잡하지만 가는 길에 신사 구경.
그들이 원래 가기로 했던 오호리 공원 옆 후쿠오카 미술관에 끌려(?!) 가
진짜 미이라!!와 세계에서 제일 긴 ‘사자의 서’도 보고…
후쿠오카에 와서 이런 걸 보게 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오호리 공원 별다방에서 커휘도 받아다 공원에 늘어져 홀짝 거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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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았던 날. 얼굴에 와닿았던 딱 좋은 가을 오후의 공기.
여유로운 공원의 풍경들.

여행책자 보고 잠깐 들른 여행자가 아니라, 거기 사는 사람이 되어 산책나온 듯한 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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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my와 타카코.
두 사람과 나누었던 이야기들. 농담들.

다행히 둘 다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 영어로 무리없는 소통 가능.

나중에 알고보니 두 사람, 오늘이 첫 데이트였단다.
야후 재팬에서 프로필을 보고 채팅하며 알게 된 사이라나.

카카코는 다른 도시에 살다 2달 전에 후쿠오카에 왔고,
지미는 미국에서 자원봉사일을 하다가, 도쿄를 거쳐 고향인 후쿠오카로 돌아온 후쿠오카 사나이.
도쿄가 싫었다고 했다.

몇 번이나 너희들의 데이트에 방해하기 싫다고 했지만,
그들은 정말로 괜찮다고 답한다. 더 이상 반론할 수 없는, 정말로 괜찮은 표정으로

그리고 이제 후쿠오카에 친구와 free room이 있으니, 언제든 놀라오라고.

그래서 너희들도 서울로 놀러오면 연락하라고 했다. 환영한다고.
하지만, 우리집엔 프리룸이 없다고. 가족들이 그런 거 싫어라한다고.
나는 서울 여자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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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리 공원에서 슬렁슬렁 걸어 시내로 나오는 길.
여는 사람 사는 동네와 다를 바 없는 풍경들이 펼쳐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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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성터를 거쳐…텐진방향으로. 점점 시내의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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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두 사람, 자신들의 데이트 코스를 포기하고
내가 막차를 타야 할 하카타 역까지 와서 버스 올 때까지 남는 시간을 이용해 small party를 하자고 한다.
오코노미야키와 맥주 한 잔. 조촐한 접대였지만, 따뜻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어쩐지 후쿠오카가 훅 가까워진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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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헤어지고 난 하카타 버스 센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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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타에 있으면 이동이 참 편하다.
시내 관광이든 큐슈의 다른 지방이든, 어디로든 나를 데려갈 버스를 쉽게 탈 수 있다.

게다가 나에게는 비장의 북큐슈 산큐패스 3일권(북큐슈에서 거의 모든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프리패스) 이 있지 않은가.
후쿠오카 시내 투어 버스인 그린 버스에서 북큐슈 횡단 버스, 공항버스까지 3일 동안 정말 알차게 잘 타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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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40분…나의 목적지로 가는 마지막 버스에 몸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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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어둠 속 큐수 고속도로를 달려 유후인 도착! 9시 조금 넘은 밤.

여기서도 결국 버스 기사 아저씨가 숙소에 연락해 주고,
픽업을 연결해 주어 간신히 늦은 시간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밤이 되어 꽤 쌀쌀해진 날씨.
난 덜덜덜 떨고 있었는데, 기사 아저씨는 더 얇은 유니폼을 입고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픽업 차량을 함께 기다려주셨다.

이건 무슨 야밤의 흑기사 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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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9시에 인적이 끊겨버린 유후인의 밤.
사람은 끊겼지만, 하늘에서는 별들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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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유후인인가? 프로모션 광고에 보면, 일본 20대 아가씨들이 가장 오고 싶어하는 온천지라는.
아마 그녀들도 밤에 여길 왔다면, 그닥 투표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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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도착한 온천도시는 적막 그 자체.
이름만 많이 들어본 유후인은 어둠의 베일 뒤에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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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온천장에서 바라본 창문 밖 풍경.

뜨거운 온천장에 몸을 담그고 나니
버라이어티했던 하루의 기억이 온천물의 뜨거운 김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문을 여니, 가을 밤 시골의 차고 맑은 공기가 훅하고 밀려들어오고.
아 좋다. 진짜…너무 괜찮은 거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공기, 최상의 콤보.

그만큼 괜찮은 하루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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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의 마무리에 꼭 필요한 것. 로손표 감자튀김과 함께.

그리고 약간의 하루키. 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소설 속 주인공들이 막 자기들끼리 하는 거지?

두 번째 밤이 이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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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 큐슈 여행 (2) 유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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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인, 토토로의 마을 유후인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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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었던 아먀보우시 료칸(由布院 山ぼうし)
온천은 쿠로가와에서 방점을 찍기로 했기 때문에, 그냥 싼 가격의 적당한 방을 대충 잡았는데
온천도 있고, 1인실도 있고 해서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담한 침대방과 온천.
역에선 걸어서 5분 거리. 바로 유후인 입구인 B-Speak 맞은 편.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란넷의 도움으로 적절한 가격에 방들을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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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인의 상징같은..누구나 찍어오는 빨갱이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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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예상했던 유후인의 예쁜 가게와 풍경 퍼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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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꾸밈 하는 일본 특성대로 참 잘 꾸며놨다.
딱 여자들 취향.

하지만, 굳이 꼭 여기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들을 모아다
작은 시골 마을을 무수히 사람들이 흘러 들어오는 각광받는 관광지로 재탄생하게 한 뒷단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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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동네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팔고 있었다.
소품과 어쩌구 저쩌구..진짜 세상의 온갖 잡스런 것들을 다 모아놓은 듯한.

크지도 않은데 이 동네 한바퀴 돌고 나면,
가전 제품 빼고 신혼 살림 살이 풀셋과 한 달치 식량 마련이 가능할 듯.

얼마나 맛난 것들을 많이 팔던지.
쇼핑에 관심이 없는 나는 한국 이마트에서 갈고닦은 범상치 없는 시식 신공을 발휘해
유후인 맛보기에 주력했다.

일본식 쿠키야 대략 경험과 감이 있기 때문에 그렇구나=맛있구나 했지만
유후인의 반찬들은 진짜 눈돌아..아니 혀돌아가 가게 만들더라.

우엉이나 연근 조림, 이름을 알 수 없는(까막눈 ㅠ) 정체불명의 무침과 젓갈들.
동네 시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비주얼의 것들을 예쁘게 유후인 스티커붙여 소포장해 놓았는데
사르륵 특유의 감칠맛 나는 일본 조미료 맛이 혀를 우롱?? 한다.

배낭족만 아니었다면, 싹 쓸어왔겠지만 내가 가진 것은 아주 작은 뒷동산용 배낭 하나 뿐.
대신 끼니를 걸러도 될만큼의 시식으로 풍족하게 배를 치우고..응??

파삭파삭 기름진 유후인 러스크도 기억난다.
물론 누구나 먹는다는 금상 받은 금상 고로케도 먹었다. 2개 먹었다. 쩝쩝…생각만 해도 침 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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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속 마을. 크리스마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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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지루하게 엄마가 빨리 쿠키를 고르고 나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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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하고 맛집 도는 ‘아가씨 여행’이란 것이 있단다.
딱 그 ‘아가씨 여행’이 어울린다고…라고 포장하고 있는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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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네 주민은 다르다.
예쁜 가게에 눈이 쏠리지 않고, 바쁜 걸음을 재촉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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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긴린코 호수.

가는 길 곳곳에 긴린코 호수 가는 길 팻말이 어찌난 다양하게 고급스럽게 붙어있던지.
어느 대단한 곳을 향해 가는 듯, 기대감을 고조시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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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체는 보라매 공원 호수와 견줄 만 하다.
백조인지 오리인지 포동포동한 것들이 아주 가까이서 거닌다는 것 외에 ..그다지 큰 감흥은 없다.

이걸 관광지로 만들어낸 포장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당신은 알맹이가 없어. 하지만, 포장이 바로 당신의 펀더멘털이라면?
전날 밤 읽은 하루키 단편 소설에서 여자는 이런 류의 대사를 막 날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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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 유후인이 좋았다.
이런 유후인.

포장의 한 껍질을 벗기면, 바로 뒤편에서부터 펼쳐지는 유후인.
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영감을 받았을 시골 시골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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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도 담도 없이 이어진 포장지 바로 뒤에 붙어있는 집들.
문 앞까지, 마음만 먹으면 집안에라도 들어갈 수 있을 듯한 시골의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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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뭔가를 말리고 마당들.
내리쬐는 적당한 볕과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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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에 매달아 놓은 광주리에선
표고버섯이 볕을 받으며 익어간다. 집에서 반찬해 먹을 듯한 양.
이 집의 저녁 식탁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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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빛을 받으며 건조되는 신선한 먹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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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양파만 말리란 법 있나.
구멍난 양말, 발가락 양말들이 귀여웠다. 색감도 참 이뻤고.

저걸 신고 다니며 뭘 하시나? 멋으로 신는 양말은 아니었다. 노동이 느껴지는 양말.
긴 시간 밭에서 땀내며 일하시는 분들을 위한 양말이라고 멋대로 추측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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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조리개가 있는 풍경. 이 집엔 물주는 것이 사람이 산다. 당연한 것을 ㅋㅋ
그 당연함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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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쁜 시골마을이 포장지 뒤에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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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유후인은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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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사는 관광객이 아니라
시골 마을 방문자로 유후인을 다시 보러 오고 싶다.

어디선가 토토로가 튀어나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골 마을, 유후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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