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펑펑 아침, 탄천의 기품있는 까치 선생.
홀로 딛고 설경 내려다 보시는 계신 모습이, 어쩌나 고아하시던지. 눈에 선하다.

< 내가 사는 피부 (La Piel que Habito)> by Pedro Almodovar (2011)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이 결국 너를 집어삼킬 거야” -
너무 많은 감정을 지닌 남자가 있다. 그는 인공피부 이식의 대가인 세계적 과학자다. 하지만, 그는 과학자가 되기엔 너무 많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는 배다른 동생과 눈이 맞아 도망가다 자동차 폭발로 끔찍한 전신 화상을 입고 식물인간이 된 아내가 있다. 그는 그런 아내를 위해 밤낮으로 잠도 안 자고 뱀파이어처럼 연구에 몰두해 가까스로 그녀를 회생시킨다. 자신의 딸을 강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강간범도 있다. 복수의 차원에서 그를 납치해 성전환을 시키고 전부인과 똑같은 외모로 만들어 6년간이나 감금해 둔다. 하지만, 결국 그는 딸의 강간범이자 자신의 전 아내와 똑같은 외모를 한 그녀(혹은 그)와 사랑에 빠져 버린다.
하지만, 기껏 살려놓은 아내는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새로 만든 여자는 마음의 문을 연 순간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다. 그리고, 그녀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쏜 총 한 발을 맞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도 그의 친모와 함께. 이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영화는 받아들이기 힘든 강렬한 감정들이 빚어내는 상상초월 반전투성이다. ‘비명과 경기가 없는 공포영화가 될 것. 과거 나의 어떤 영화보다 가장 심한 영화가 될 것’ 개봉 전 감독의 선언은 무색하지 않다. 남자는 여자가 되고, 복수는 사랑을 변신하고, 지배의 피지배의 관계는 역전 당한다. 여자를 강간한 남자는 그 스스로 여자가 되어 강간을 당하며, 자기가 강간한 여자가 당한 것과 똑같이 남자가 마구잡이로 들이대는 너무 큰 성기에 고통을 느끼며 소리를 질러댄다. 과학자는 자신이 창조한 존재에게 역으로 유혹당하고, 엄마는 아들에게 재갈 물린 채 그가 형수 뻘의 여자를 강간하다 형에게 살해 당하는 것을 CCTV로 지켜봐야 한다.

무엇보다, 나이 들수록 섹시해져만 가는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과학자라는 설정부터가 심히 괴상하다. 흰 가운을 입고, 일군의 실험 기구들에 둘러싸여 스포이드를 들고 정체불명의 물질을 주입한다든가, 국제 학회에서 진지한 발표를 하는 반데라스라니. 이 세상 사람들에게 랭킹을 매겨 차례로 과학실에 입장시킨다면, 아마도 맨 마지막으로 등장할 것 같은 남자가 반데라스 아닌가. 게다가 최고급으로 정평이 난 알모도바르의 미장센에 비해, 과학씬은 좀 우스꽝스럽다. 인공 피부 시술 같은 엄청난 작업에서 얼기설기 찢어진 거즈를 대고, 면봉으로 붙여나가는 어설픔이라니. 인공 피부 생성 방법에 관한 학술 발표는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과학’은 자연 탐구의 학문적 영역은 아닌 것 같으니까. 여기서 과학은 복수의 대상을 학대하고, 대상에 대한 지배의 수위를 심화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과학자 반데라스는 직업과 외양만 조금 바뀌었을 뿐 20여 년 전 ‘욕망의 낮과 밤(Atame!)’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즉, 여자를 가두고 묶고 지배하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역할이다.
달라진 것은 지배의 수준이 육체를 겉에서 결박하고 구속하는 차원을 넘어서, 직접 육체에 메스를 대고 조직을 절단해 재창조하는 수준으로 심화되었다는 점. 알모도바르는 육체를 좀 더 집요하게 탐닉하기 위해 과학을 동원한 것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탐닉의 대상은 접근 불가능한 존재로서 한 치의 틈도 없이 탐닉자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과학자에게 과학이 그러하듯이.

알모도바르의 인간들은 모두 욕망에 미쳐있고, 상대방을 소유하지 못해 날선 신경쇠약직전에서 안달복달한다. < 욕망의 낮과 밤>에서 1차원적으로 다소 서툴게, 하지만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 직접적으로 구현한 열정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방법적으로 심화된 것을 본 것은 < 그녀에게> 였다. 움직이는 대상을 살포해 묶어 놓는 수준이 아니라, 애초에 식물 인간을 만들어 정해진 지배 관계에서 원천적으로 탈출 불가하게 만든다. 그래 놓고는, 대상에게 쏟아 붓는 그 지극한 애정이라니. 하지만, < 내가 사는 피부>에서는 꼼짝할 수 없는 대상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것도 모자라. 아예 대상의 육체를 새로 만들고 가공하고 조작한다.
그것이 사랑이냐 스토킹이냐,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라는 논의에서 알모도바르는 일찌감치 벗어나 있다. 상식이나 윤리 따위의 선을 훌쩍 뛰어 넘어 욕망의 극한을 탐구해 온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이런 극한의 감정 없이는 아예 성립할 수가 없다. 심지어 알모도바르는 사랑의 완성으로 육체의 대상화라는 지극히 비윤리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반데라스가 복수를 위해 여자의 육체를 찢고 가공하고 새로 이어 붙이는 과정은 동시에 극렬한 복수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원초적 욕구로 바뀌어가는 불가해한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육체는 양도 가능한 오브젝트로 물질화한다. 누더기처럼 조각조각 찢어진 피부. 이제, 알모도바르는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하고 있다.
이런 강렬한 감정은 문명의 최첨단을 상징하는 과학자가 드러내는 것이기에 더욱 아이러니하다. 그는 처음 강간범에게 “너는 그 밤을 잊었겠지만,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한다.”라고 복수를 선언한다. 하지만, 6년 후 그는 모든 맹세를 새까맣게 잊고 그녀(혹은 그)와 광기 어린 사랑을 나눈다. 그는 확실히 감정이 많다. 과학을 하기에는. 그의 엄마의 말처럼 ‘사랑에 미쳐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아무 보상없는 파국을 맞는다.
‘점점 성숙해져 가는 알모도바르’란 이런 이상하고 기괴한 이야기를 현란한 컬러 콤비네이션의 최고급 미장센과 음악, 그림들로 치장해 전달하는 기술의 발달을 뜻하는 것일까. 광기는 깊어지는데, 화면과 음악은 점점 더 고급스러워져 간다. 우아한 왕실 귀부인의 포장을 뒤집어쓴 정신이상자. 우아하게 미쳐있는 영혼. 알모도바르는 역한 날 것의 살코기를 최고급 명품 가방에 넣어서 던져준다. 하지만, 캘리백의 지퍼를 열면 와르르 쏟아지는 것은 방금 도살한 돼지의 찢어진 살점들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아직도 허연 김이 펄펄 피어 오르는.
그 날것의 살코기가 좋아, 알모도바르를 보아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것을 포장하는 방법이 진화해 가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보고 있다.

다른 알모도바르 영화에서처럼 < 내가 사는 피부>를 지배하는 정서는 빠시온(Pasion)이다. 다만, 이제 그의 욕망은 그저 대상의 육체를 표피에서 만지고 탐닉하는 것에서 한 걸음 내디뎌, 직접 육체를 만들고 가공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고,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과학’을 꺼내 드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이 다음엔 대체 어떤 방법이 동원될 것 인가. 무엇이 남아있단 말인가. 물음표는 열려 있다. 여전히 알모도바르는 나에게 기다림과 미지의 대상이다. 누군가 인간이 닿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가는 과학의 발달을 보며 감동하듯, 난 알모도바르를 보며 탐닉의 진화에 감동한다.
그것은 영원히 다가가지 못할 타인. 그 타인에 어떻게든 근접해 보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혹은 미쳐버린다 해도 이룰 수 없는 불가능에의 지극히 성실한 commitment이기 때문이다.
* 엄마
“집에 오기 위해 두 명을 죽여야 했어요. 저 빈센테에요.”
이 엉망진창 이야기 속에서도 오직 엄마 만이 파국에 치닫는 아들의 위험을 예언하고, 경고하고, 죽음의 순간까지 아들과 함께 한다. 성별이 바뀌고 두 명을 죽인 오디세이 같은 여정의 끝에서 여자(남자) 찾아가는 곳도 결국 엄마다. 이런 것이 알모도바르스러움. 간만에 만난 마리사 파레데스! 반가웠다. 스페인 아줌마 배우들은 어쩜 저렇게 한없이 엄마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여자일 수 있을까…

* 인체 부감씬
알모도바르의 시그니처 씬이라고 해야 할까. 특정 인물의 시점을 넘어, 전지적으로 뭐 하나 가리지 않고 육체의 적나라함을 보여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카메라. 유달리 알모도바르씨가 애정하는 숏들. 이번에 쫌 남발하셨네요. 부끄럽구요… =.=
* 멋진 씬들
많은데…반데라스와 마리사 파레데스의 죽음씬. 대칭 부감숏. 어느 명화첩에서 튀어나온 듯.
두 남자의 관음씬. 화면에 줌인된 여자를 바라보는 반데라스. 그리고, 동생의 혀플레이(?)
여자가 누워있는 수술대 부감숏…”숨을 거칠게 쉬지마.” 기타 거의 모든 장면들…
여주인공 엘레나 아나야. 육체가 후덜덜…여자 눈으로 봐도 비현실적.
* 아쉬움
그런데 왜 < 라이브 프레쉬>같은 격한 떨림이나 < 내 비밀의 꽃> < 신경쇠약직전의 여자>같은 몰입이 느껴지지 않을까. 아쉬운 것은 인간의 감정선에 대한 묘사이다. 멋진 화면에 들인 공에 비해, 감정이나 행동의 묘사가 많이 없다. 점점 사람 대신 화면 위주로 가는 것 같다. 대신 눈을 떼기 힘든 멋진 씬들이 펼쳐지지만, 아쉽게도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에서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고급스럽게 추상화되고 있다 ㅠ 그래서, 반데라스나 기타 주연들의 내면을 주로 상상과 추측에 의해 따라가야 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끄집어내어 보여주는 건 유치한 건가. 쩝.
그의 카메라가 조금 더 인간의 감정에 향하기를 기대해 본다. 난 그럴 때 너무 좋은데. 역방향이라 어렵겠지… ㅠㅠ 씨. 사람은 진화하기 보다 근원으로 돌아가기가 더 힘든 듯.
* 알모도바르를 보는 이상적인 자세
환상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멋진 화면과 색채를 펼쳐 보이는 이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 노트북으로 봤다. No way! 말도 안 돼. 하지만, 새까만 어둠 속에서 속옷만 입은 채 가슴에 올려놓고 화면을 껴안다시피 한 채로 좌우로 구르며 때로는 화면 속 그들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코 앞에 놓인 빛나는 액정 속에서 알모도바르를 따라가는 것. 육체와 화면을 최대한 밀착하고, 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욕망을 한껏 발산하는 조금은 에로틱한 이 방식이 어쩌면 알모도바르를 보는 꽤 적합한 자세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가위눌림
< 내가 사는 피부>를 보고 자다 가위에 눌렸다. 정신은 차렸는데, 거대한 것이 내 온몸을 짓눌러 꼼짝할 수도,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사랑,사랑’하고 외치며 가위에서 풀려났다. 동생에게 말했더니 “알모도바르답네.” 시크하게 한마디 툭.
* 알모도바르에 대한 이전 감상문들
알모도바르의 첫 번째 영화 < 페피, 루시, 봄> : Raw is Origin (2007.1)
귀향 (Volver) : 죽음과 함께 사는 여자들 (2007.1)
2011.11.25~2011.11.30
버드와 함께 옛날 카오산에 대해 이야기했다. 버드가 말했다. “At that time, it was beautiful.”
정말 그랬다. 이젠 아니다. 돈이 많은 것을 스포일했다. 왜 태국을 그토록 좋아했을까. 잠시나마 부자로 살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 자체로 순수하게 아름다운 것들도 있었다. 돈은 그 알갱이마저 쓸어가 버렸다.
추억을 말할 수는 있어도,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웠다 해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희미한 맛이 남아있었다. 그건 지나간 청춘의 맛이었다.

















내가 읽은 one of the 최고의 하루키.
먹고 마시고 놀고
# 방콕 로컬 팟타이 – 씹 싸마이 (Thip samai)
태국사람들이 줄서서 먹는 팟타이. 카오산 로드에서 가까움.
걸어서 가긴 좀 글쿠. 20밧 오토바이 적정. 씹 싸마이하면 모르는 사람 없지롱.

잠과 싸운 한 해 였다. 그리고 길이 꺾이는 곳마다 쉼없이 NO를 외쳐야 했던 한 해였다. 촛불을 들었고, 촛불처럼 흔들렸다.
1. 불면
1주일에 15시간 정도를 자고 나서도, 내 몸은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별로 살아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사고는 극으로 치닫고, 머리 속은 몽롱하고, 머리로 해야지라고 생각한 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내일 당장 회사를 그만 두고, 어디 어두운 곳에 쳐박혀 수면제를 먹고 쓰러져버리자. 검은 벽천장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생각하다, 또 기계적으로 셔틀을 타고 회사를 가서 일을 했다. 술을 먹으면 필름이 끊기고, 눈을 떠 보면 엉뚱한 곳에 와 있기도 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미련하게 버티다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병원을 찾아 수면제를 처방받고, 조금씩 정상의 사이클을 찾는 동안, 난 몸과 나의 관계를 생각했다. 더 이상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식으로 연명할 수 없다는 걸 겨우 깨닫게 되었다. 슬프고도 아쉬운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친숙해져버렸고 내 삶의 중요한 것들을 만들게 해 준 패턴을 -그것이 비록 모범적이지 않은 것일지라도- 놓아야 한다는 것. 불면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내 몸이 달게 받아야 했던 힘든 벌이었다. 그래, 난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다. 그리고, 젊었을 때 해냈던 것과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어려운 질문이 남았다. 2012년의 숙제다.
2. No
아니야. 안돼. 못해. 가지마. 만나지 마. 끊어, 짤러. 그래서일까? 올해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NO일 것이다. 그 무엇, 누구에게보다 우선 나 자신에게. 왜 그렇게 NO만 해야 했을까? 나는 대체 어떤 가능성을, 어떤 희망을, 어떤 미래에 등을 돌린 것일까. 가장 무서운 가정은 ‘그저 적당히 편히 머무르고자 함’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그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나는 내가 외쳐야 했던 NO의 의미를 해석하고 또 해석했다. 분명히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NO가 풍기는 부정의 기운에 후달렸다.
그러다, NO라고 하는 사람은 지키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에게도 소중한 것이 생겼구나. 그거였어. 그 단순한 거였어. 심하게 YES를 외치며, 지옥 끝까지라도 내려가던 때가 있었다. 잃을 게 없던 시절이었고, 그 시간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웃음이 나왔다. 겨우 이제서야? NO라고 했을 때,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맑고 푸르고 조용한 바다를. 2012년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한 더 많은 YES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촛불
MB 1년차의 *극도의* 스트레스는 무기력과 외면으로 이어졌고, 그것을 깨운 것이 트위터와 나꼼수였다.
처음엔 트위터가 너무너무 싫었다. 그러다, 알아야 한다는 업자의 불안감과 의무감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뭘 써야 될지도 모르겠고, 어색하기만 했지만, 닥치고 쓰다보니 뭐 또 쓸만도 하고 재미가 있기도 했다. 세상 돌아가는 다른 축이 보여, 신기하기도 부담스럽기도 했다. 여전히 그렇지만, 트위터가 없었다면 올해 그 무수한 분노의 순간들…나와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어떻게 그렇게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을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심지어 분노를 창작력으로 승화시켜, 바쁜 나를 위해140자로 요약해 주기까지 하니.
나꼼수를 한 번도 방송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저 사람들은 싸우고 있는 거잖아. 자기꺼 다 내놓고 계란으로 바위치고 있는 거잖아. 최전선에서 죽여버리고 싶은 작자들에 맞서 맨몸으로 싸워는 이들이 웃겨주기까지 하니 고맙지 않을 도리가 없다. 뭉클한 순간이 많았지만, 그럴 때 감상적이 되면 꼼수스럽지 않은 것 같아 대신 거리로 나갔다.
나꼼수보다 더 웃긴 건 정치였다. 개콘보다 더 웃겼고, 썩은 내가 풀풀 났다. 속이 끓고 머리가 아파서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고 소리라도 치고 오면 그래도 그런 날은 편히 잠들 수 있었다. 바꾸고 싶었나? 그냥 지극히 개인적인 속풀이였다. 저렴한 테라피 세션이었다. 하지만, 분명 2012년의 촛불은 다른 의미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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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운전이 제법 익숙해졌고, 영화와 책을 거의 보지 않았고, 뭘 해도 안착이 되지 않는 어수선한 한 해였다. 이런 해를 보내고 나면, 이 시점에 드는 기분은 한 해의 지나감에 대한 안도감 뿐이다. 의지와 무관하게 슬금슬금 희망이란 것도 피어오르게 된다. 마침 다가온 새해는 실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믿고 싶은 시간의 리셋 주문. RESET. 시작한다는 느낌으로 가득 충전시키고, 새로 시동 걸어본다. 부릉부릉~
정말 중요했던 순간은 찍을 수도 말할 수도 없구나. 그래도…내게 와 잠시 머물렀던 시간들.
1월
Vegas/Hawaii
처음 가 본 미국. 끔찍했던 라스베가스라는 도시.

아무 생각없이 스탑오버했다 로망으로 남은 하와이. 오감으로 느껴보지 못했던 천상의 ‘날씨’와 미지의 원시림.

2월
Long Long Winter
롱롱 윈터. 길었던 2월의 밤들.

3월
Days of cookies and cakes
나날이 빛을 발했던 뎀비의 케이크와 쿠키 신공. 뎀비 어시로 사진만 찍었다.

4월
Illumination
세상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5월
Air
술집 창을 열고, 하늘을 보며 마시기 좋았던 날들.
잔차 골프 연애 그 무엇에도 좋았던 날들.


6월
Keith & Rose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던 계절,
내 평생 소원이었던 키스자렛의 솔로 콘서트


7월
Rainy Days
지리한 우기, 빗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치고 싶었다.

8월
Summertime
멍하니 여름이 갔다. 기억 나지 않는 시간.
그런데, 어디선가 꼼지락꼼지락 소리가 들렸다.


9월
Riding
비가 그치고, 자주 한강으로 나갔다. 가만히 앉아 해가 지는 걸 보고 돌아왔던 날들.

10월
Bye bye
블룸앤구떼가 문을 닫고, A스토리도… 한 시절의 끝


11월
Bangkok
8번째 태국 여행.


12월
Candle
촛불을 들었다. 촛불처럼 흔들리기도 했다.

굽이진 좁은 철계단을 올라 옥상에 이르렀을 때, 어스름 여명이었다. 여기저기 제멋대로 꽃들이 피어난 옥상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난, 무언가의 부재를 통째로 실감했고 자제심의 한끝마저 놓아버린 채, 무기력하게 엉엉 울어버렸다. 옥탑 건물에 매점 아줌마가 쇠창살 너머로 나를 애닯게 쳐다보고 있었다. 난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그녀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난..난…잃었어요.” 아마도 그렇게. 갑자기 아이들이 빵과 우유를 사겠다고 우르르 몰려왔다. 아이들의 인파에 나는 옆으로 밀쳐졌고…
순간 전개할 스토리가 바닥난 나의 무의식은 더 이상 꿈을 잇지 못하고 현실로 튕겨져 나왔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되고, 베갯잇이 흠뻑 젖어있었다. 가슴께가 아팠다. 물리적인 아픔이었다. 자각해 본다면,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을 법한 통증. 꿈에서는 깨어났지만, 꿈에서 시작된 눈물도 통증도 그치지 않았다. 꿈의 어느 중간부터 시작되었을 눈물은 현실까지 이어져 오열에 가까운 클라이막스를 찍고 점차 잦아들었다.
어느 어두웠던 새벽이 기억났다. 그 새벽의 맑은 눈물이. 오늘은 주체할 수 없이 복받치는 눈물이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자각한다는 것과 자각된 현실을 하루하루 산다는 것의 차이. 인식의 힘을 말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형태로 인식된 삶을 산다는 건 또 다른 문제이기에 가끔은 폭발. 그리고 다시 균형…
몸은 줘도 마음은 주지 않는 쌀쌀맞은 계집같은 이 도시의 밤에는 유난히 혼자된 인간들이 많다.
갑작스레 정전맞은듯, 핸드폰 하나 붙들고 다들 어디론가 뚜두두 뚜두두…메이데이 메이데이.
이맘때 쯤이면 한 번씩 해주는 집까지 걸어오기 놀이. 예당 찍자마자 나뭇잎 사이로 후둑후둑.
생존본능으로 차도에 뛰어들어가 잽싸게 택시 잡아타자, 빗줄기 와르르 쏟아진다. Mission fail…
왔다갔다 부지런한 택시의 와이퍼 사이로 쓸려가는 시간을 보았다. 허무하게 스러져가며 그려진 무늬가 예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