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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2009)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7701
1.
엄마의 불안한 눈동자는 필사적으로 자식의 육체를 배회하지만, 자식의 영혼은 어디론가 빠져나가 엄마가 붙잡을 수 없는 먼 곳으로 흘러간다.
자식은 여자에게 홀려 넋을 잃고 뒤를 쫓는다. 엄마는 그런 자식의 뒤를 쫓는다. 여자와 자식이 홀연히 사라지면, 쫓던 이들이 남겨진 곳은 미로.
그렇게 영화는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향한다. 강물의 흐름처럼 서서히 방향을 뒤틀어, 반대편 기슭에 숨어있던 경악스런 사실에 다다르기까지. 엄마는 이 음산한 회전의 중심축이다. 자식에게 속아야 할 모든 이유를 가진 사람, 바로 엄마다.
2.
꿈을 꾼 듯한 시간이 흐르고 천천히 눈을 뜬다. 손은 흥건히 피범벅이다. 손에 묻은 피는 닦아낼 수 있지만, 영혼이 두른 피칠갑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누구의 죄일까.
다쳐서 처음 피를 본 사람은 놀래서 피를 닦지만, 피에 흥건히 젖어 있는 자는 더 이상 피를 닦지 않는다. 그는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다. 미소를 지을 수도, 다정하게 말을 걸 수도 있다. 뭐든 다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선을 넘어가면 소리가 안 나온다. 그 어떤 것도 아닌 표정을 지을 수 있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사람은 그럴 수 있다.
난 그래도 사는, 살아야 하는,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다. 엉망진창인 채로라도.
3
여전히 < 마더>에서는 밥 먹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아무리 잔인하고 음습한 현실 속에서도, 밥을 하고 먹여주는 한 걱정없다. 난 봉감독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그 모든 밥 먹는, 정확히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밥먹이는 장면이 너무나 살갑다. 얼어붙어 가는 지구를 달리는 < 설국열차>에서는 또 누가 누구에게 어떤 밥을 먹일까? 폐쇄된 극한의 상황에서 밥은 보다 절실한 생존의 상징이 되리라.
인식의 균열이 임계치에 이르러 단순한 한 마디의 질문으로 발화되는 것도 여전하다. “엄마 없어?” 질문인지 절규인지 모를 이 말은 < 살인의 추억>의 “밥은 먹고 다니냐?”에 필적하는 세기의 명대사다.(나에게는^^) 물론 후자는 송강호의 애들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죽도록 뒤쫓아도 연기처럼처럼 빠져나가고 마는 징그러운 놈이지만, 그래서 억울하고 분하기 짝이없지만 그런 놈조차 밥 먹고 똥싸고 숨쉬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모든 게 엉망징창이 되어버린 순간, 짠~하고 나타나 누명을 뒤집어쓰고 내 자식 살려주는 하늘이 내린 동앗줄처럼 반가운 희생양이지만 내 자식보다 더 덜떨어진 저 아이조차 어떤 엄마에게는 귀한 자식일 것이다.
< 괴물>에서 강두는 현서 대신 살아온 아이를 자기 자식인 양 극진히 키우지 않는가. 칼바람 부는 추운 겨울날, 뜨거운 밥을 해 먹이며. 혜자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혜자는 자기 자식 살리자고 또 한 자식을 죽여야 한다. 내 자식을 살린 기쁨과 동시에 자기 자식을 지키지 못하는 세상 모든 엄마의 고통이 혜자에게 쏟아진다. 보편성과 특수성은 뜯어내지지 않는 악귀처럼 쌍으로 들러붙어, 천국같은 지옥을 선사한다.
4.
< 박쥐>란 영화는 그냥 보면 안되는 영화같았다. 자꾸 뭔가 해석을 하게 했다. 이야기와 영화에서 중간에서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해설자의 시점이 걸리적 거렸다. 그가 설명하려는 대상은 잘은 몰라도 어쩐지 대단히 심오하고 멋들어진 것일 것만 같다. 때깔도 죽여줘서, 매우 유혹적으로 지적 도전 혹은 허영을 부추긴다. 아무 생각없이 살던 와중에 뜬금없이 죄니 구원이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신선한 경험이다. 그냥 그렇다. 멋지지만 어디 먼 나라 의상을 고쳐 입은 듯한 이질감…
< 밀양>은 거대한 세계이지만 너무 칙칙하다. 그냥 눈을 돌려 버리게 된다. < 밀양>이나 < 박하사탕>은 왠만한 영화라면 감히 시도할 수도 없는 영혼의 깊은 곳으로 인도하지만, 그 밑바닥은 너무 이상한 곳이서 다시 혹은 자주 가고 싶지는 않다.
< 마더>는 오리지널하다. 공식도 해석도 아닌 진짜배기 원형의 텍스트. 한국 사람의 이야기. 엄마의 이야기. 너무 사랑해서 죄를 짓는 줄도 모르는 한 사람의 이야기. 고독한 줄도 모르고 거대한 풍경 속을 홀로 헤쳐 걸어 들어가는 너무 많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 .
5.
첫 장면의 물음표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느낌표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 어떤 설명도 필요없이 그 춤안에는 모든 ‘이유’가 다 들어 있었다. 꿈꾸듯 흐르는 영화 속에 푹 젖어 두 시간을 보내고 난 후, 극장 안에서 나 혼자 박수를 쳤다. 참 나, 이렇게 잘 만들 수가 있나.
생략하고 더 생략해서, 알짜배기만 남겨야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인류에 도움되는 일 해보고 싶었던 좋은 남자의 이야기다. 항상 그렇듯 의도는 빗나가고, 때마침 등장하는 나쁜 여자의 유혹에 상황은 더더욱 엉망이 된다. 결국 선택한 거창한 순교의 결과는 고작해야 사태를 원점으로 돌리는 정도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죽어야 했던 남자의 선택에는 숭고함에 깃든다.
박찬욱의 죽여주는 스타일과 국민 배우 송강호라는 간판, 영화의 핵심을 잘라내고 적절히 호기심만 자극한 마케팅의 3박자가 어울려 다시 한 번 초특급 A급 대접 받는 B급 무비를 탄생시켰다. 친절한 장금씨와 싸이보그라도 괜츈해에 이어. A급 영화에 밀리지도 않고, 적지 않은 예산에 다들 탐내는 A급 배우들을 써 오래 공들여 찍고 전국 개봉관에서 일제히 상영하는 고품격(?!) B급 무비. 그래도 인간의 내장을 후벼내 늘어놓은 것 같은 불편한 감정들과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질주하는 유혈낭자 살색만발 비주얼은 여전히 자신이 타협하지 않는 B임을 주장한다. 몇몇 사람들은 견디지 못해 중간에 극장을 나가 버리게 만들 만큼의 강력한 파워로.
인상적인 것은 뱀파이어 영화답지 않은 일상성이다. 순교집단이 모인 프랑스의 병원에서는 다들 모여 배구를 하고, 불치병을 고친 신부는 초딩 동창이며, 동네 한복집 주인여자는 보드카를 마시며 마작을 한다. 이런 낯선 것과 익숙한 것과의 이종교배가 불러일으키는 ‘이상한’ 느낌은 송강호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평범한 우리를 대표하는 캐릭터였던 송강호가 전혀 해 본적 없는 이상한 뱀파이어가 되었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뱀파이어가 뭐 별건가. 이건 뭐 식성이나 생활 습관 같은 문제라구요.” 이 송강호는 뱀파이어라는 기괴한 존재가 아니라 마치 밀양이나 우아한 세계의 한 장면에 등장할 법한 송강호다. 이 영화 속에서 송강호의 뱀파이어 스토리는 정말 그렇게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그렇지…저런 게 고민이 되겠지. 특별히 분류되는 뱀파이어 영화 속의 뱀파이어가 아니라 오늘 내가 정말 뱀파이어가 됐다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하루를 보냈을까를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가끔은 키득키득 블랙한 실소를 자아내지만, 사실은 그래서 더 큰 충격을 주는 것이다.
그의 최후가 피빛을 넘어서 진한 황금빛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부분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사람인데 두 번씩 죽어야 한다는 것은 참 X같은 일일 것이다. 게다가 마침 이전엔 몰랐던 삶의 꿀맛도 알게 되어버렸거늘. 너무 좋은 나머지 이게 죄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걸 알아버리고 나서도 선택한 두 번째 죽음이야 말로 진짜 순교이며 더욱 거룩하다. 삶을 초월한 종교인이 아니라 삶에 연연하는 한 평범한 인간…아니 뱀파이어로서 내린 선택이니까. 역시나 지옥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일까……..
그런 저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려했으나, 역시나 나를 압도하는 건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다. 이런 걸 느끼기 위해 아름다운 5월의 황금연휴에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이런 순간 순간을 다 견디고 싶지 않다. 영화에게 빨대 꼽힌 느낌이랄까? 보고나니 기운이 쪽 빠지고 어지럽고 멍때린다. 잘 가지도 않는 스타벅스가 눈에 띄길래 차가운 망고 슬러시를 사 벌컥벌컥 마셔댄다. 극장 밖 밤공기가 이렇게 시원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어디선가 박찬욱 감독은 이런 풍경을 망원경으로 훔쳐 보며 혼자서 ㅋㅋ 거리고 있는 거 아닐까? ㅋㅋ
주류의 피를 수혈받은 B급 무비는 그 자체로 변종 뱀파이어다. 사람들의 지갑에 링겔을 꽂고 쪽쪽 돈을 뽑아마신다. 물론 인터넷으로 자살단을 모집하는 영화 속 송강호처럼, 관객들의 자발적 동의를 얻어. 이것은 그저 그런 인생에서 위대한 혹은 강력한 뭔가를 갈구하는 관객과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는 거장 감독의 의기투합이 이루어낸 괴상한 타협점일까? 아무래도 난 영화보다는 제법 차려입고 서로의 팔장을 낀 채 극장에 들어선 이 수많은 사람들이 스크린 앞에서 이 영화를 만나고 있는 장면이 더 재미있다. 대체 저들은 뭘 보러 왔던 걸까? 또 난? ㅋㅋ 네이버 영화평을 찾아보니 아주 난리가 났다. 확실히 박찬욱 감독은 한 방 제대로 날린 것이다. 그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아남을지 몹시 궁금하다. 거장의 브랜드를 내세워 관객과 아슬아슬하게 유지해온 이 흡혈 관계의 전개가.
넌 지나간 세월 앞에서 미친 개마냥 미쳐 버릴 수도 있어…운명을 탓하며 욕을 할 수 도 있어. 하지만 결국 끝이 다가오면 그냥 가게 나 둬야 해.
노인에서 시작해 역순으로 살아가야 하는 벤자민 버튼. 하지만 영화는 원치 않는 삶, 풀 수 없는 숙제가 강제된 이의 내면의 고뇌를 파고 들기보다는 불평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벤자민의 삶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다.
사랑을 나누었던 여자가 하루 밤 사이에 갑자기 사라져도, 자기를 버린 아버지가 느닷없이 등장해도,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놀러 가도, 사랑하는 가족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이 와도, 그는 말없이 모든 것에 순응한다. 참 좋은 사람. 물려 받은 단추 공장 따위 관심이 없어 모든 걸 팔아 사랑하는 이와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사람. 욕심이 없다. 극단적인 비정상이 애초에 불필요한 욕심따위 거세해 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황폐해지기 보다는 삶의 지평을 넓혀가며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다.
시간이 거꾸로 가든 똑바로 가든 영원한 것은 없으며, 뭐가 닥치든 어떤 인생을 보내든 우리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결론은 let it go라는 것. 영원하기를 바래야 마땅할 사랑하는 이와 보낸 그 짧은 스윗 스팟의 순간조차도, 그는 다음 순간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 벤자민과 우리는 모두 같은 흐름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벤자민의 담담함보다는 ‘유한’이라는 실존의 벽 앞에서 울부짖는 데이지의 절규가 더 가깝게 와 닿는다. 그 절규조차도 지속되지 않지만.
간만에 우디 알렌 영감님. 게다가 내가 동경해 마지 않는 스페인…그 중에서도 바르셀로나. 게다가 하비에르 바르뎀! …하비에르 바르뎀!! 말라비틀어진 건어물녀의 가슴조차 다시 콩닥콩닥 뛰게 만들 수 이 남자.
♨ 하비에르 바르뎀, 그 남자의 하체 수난기 (2007.10.10) ♨
각개로 보면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베스트이지만, 합쳐놓고 보면 좀 해괴한 조합이기도 하다. 뉴욕쟁이 영감님의 스페인 출장이라니, 게다가 페르소나 운운하기엔 너무 동떨어진 이미지의 바르뎀씨. 실제로 연인인 페넬로페 크루즈양. 하몽하몽에서의 그 끈끈하고 섹시한 두 분의 궁합이 어찌나 강력한지 아직도 눈에 선한데. 계열화시키면 180도 반대편에 찍히실 영감님의 영화. 영감님의 시니컬과는 영 거리가 멀 것 같은 열정으로 충만한 가우디의 도시. 이 의외의 콤비네이션이 익숙한 이야기를 새로운 컨텍스트에서 보게 만든다. 새로운 공간과 인물을 결합시킨 효과이다. 결국 소비하고 싶은 건, 혁명적이고 새로운 영화적 실험이 아니라 우디 알렌이었거든.
크리스티나는 실체도 없는 열정을 추구하지만, 재능이 동반되지 않은 열정은 초라하고 그 멋드러진 열정에 수반되는 인생은 피곤하기만 하다. 게다가 진정한 열정-모순 커플의 깍두기 노릇까지 해줘야 한다. 비키는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오비에도에서의 휴가를 통해 더 이상 과거의 안정된 삶에 만족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마주한다. 그들은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하비에르 바르뎀과 페넬로페 크루즈, 이 두 명의 들끓는 스페인 피는 삶의 클리쉐를 부서뜨리는 역할에 너무나 딱이다.
나라고 생각하는 나, 이럴 것이라고 흔히 받아들여지는 이면의 적나라한 실체를 까발리는 것. 영감님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잘난 주인공들은 그 모순 앞에서 당황하고, 스스로 예상치 못했던 결론 속으로 치달아 간다. 그 바닥에서 한 줌의 씁쓸한 진실이 걸러질 때까지. 그래봤자 고작 한 인간의 좁다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무슨 CIA니 FBI니 외계인의 거대 음모를 밝혀내는 것보다 백 만배는 더 재미있다. 내 안의 펼쳐진 우주의 신비를 탐험하게 해 주고 그 지평을 넓힐 기회를 주는 진정한 어드벤쳐 무비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에서는 정말 간만에 부부일기나 애니홀 계열의 캐릭터들이 등장해 바르셀로나의 두 달간 자신을 어드벤처한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비키를 작업하기 위해 데려간 기타 신이 넘흐넘흐 좋았다. 깊어가는 여름 밤 바르셀로나. 오래된 건물의 베란다에 드문드문 둘러앉아 황홀한 기타 연주를 듣는다라. …휴우. 그 오감의 어택에 인생을 다시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 봤자 돌아갈 수 밖에 없지만. 영감님의 이야기에서 딱 하나, 달라진 부분은 바로 이 결론이었다.
박용하는 조승우, 김민정은 김혜수, 또 누구는 누구…타짜의 공식을 그대로 주식에 대입한 듯한 영화인데, 의외로 재밌었다. 영화 자체가 빼어났다기 보다는 영화가 건드리는 이야기가 한 번쯤 직간접으로 주식을 접해 본(당해 본?) 사람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려 자극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주변 가까이에서 들어봤던 말들, 쓰라린 경험들을 잘 비벼냈다.
그래도, 타짜보다는 한 수 아래다. 연기들도 조금씩들 어색하고. 특히 중심을 잡아줘야 할 김민정 캐릭터가 약했다. 고운 처자처럼만 보이고, 박용하에 맘 주는 부분도 너무 순진하시다. 좀 더 쎄게 하드코어로 밀어부쳐 줬어야 영화가 사는 건데. 명대사도 꽤 나오지만, 막말 한국어의 마법사 최동훈 감독에는 못 미친다.
돈과 욕망의 관계는 뻔하다. 그런데 알면서도 당하는 게 사람이다. 나는 예외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너무나 똑 같은 마음에 똑같이 처신하고 똑같이 당한다. 그걸 이용해 한 탕 헤쳐먹는 놈들의 작전 이야기는 범국민적으로 놀아난 대한민국 대표 재테크 주식을 더러운 한 면을 씁쓸히 곰씹게 한다.
# 기억나는 대사들
주식 시장에 그동안 꼬라 박은 수업료를 모았으면 그랜저 세 대는 뽑았겠다 – 현수
바닥인 줄 알고 사는 놈들 지하실 구경하게 될 겁니다 – 주식 살인마 우박사
대가리 딸려서 깡통찼단 소린 죽어도 안해요 – 현수
주식은 전쟁이야. 미사일 팡팡 쏘는데 달랑 총알하나 들고 달려는 개미들 – 증권 브로커
아무리 발악을 해도.. 안되는 놈은 안되는게 세상이구만.. 좆같네.. – 독가스 황종구
1920년대 LA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2009년 대한민국의 오늘이 낱낱이 들어있다. 어이없는 공권력의 횡포와 촛불집회, 그리고 연쇄살인과 사이코패스까지. 심지어 그 싸이코패스의 인권까지도. 현재 상태 대한민국의 뜨거운 감자는 다 모아놨다. 엉뚱한 아이를 찾아 준 경찰에 맞서는 엄마의 눈물겨운 투쟁 정도로 기대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니 가장 선명한 것은 사이코패스의 불가해한 행적. 지난 몇 주 쏟아지는 뉴스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렸던 탓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힘겨웠다. 어설픈 정의의 구현대신, 희망을 가장한 고문의 뫼비우스 띄를 이어가야 하는 남은 자의 비극에 가슴이 먹먹했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죽음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모습에서 내 안의 감춰둔 공포를 대면했다. 닭장의 헐거운 틈을 찾아내는 생존에의 욕구가 가여웠다. 여유로이 썩쏘를 날리는 경찰의 표정에서 싸이코패스의 또 다른 얼굴을 봤다.
하지만 거기의 피켓집회는 변화를, 희망을 만들어 낸다. 오늘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수준은 80년 전 LA에도 못 미치는 것일까?
영화의 완성도니 이런 건 잘 모르겠다. 이 정도면 끝날 때가 됐는데 쯤에서 타협하지 않고 계속 밀어 부쳐 그 이상을 끌어내는 감독의 경지에 감탄할 기분도 아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선택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영화의 시작부에 A True Story라는 자막이 뜬다. 이 말의 정체는 영화가 전개될수록 더욱 소름끼친다. 현실은 언제나 픽션을 압도한다. 2009년 2월의 대한민국 역시, 그 현실을 살아내고 있다.

요즘은 특이한 걸 보면 “신기하다” “기발하다” “그 근원을 더 파헤쳐 보고 싶다” 등등 보다는 “쩝이다” “왜 저러냐” “거기까지~” 이런 반응이 먼저다. 연로의 동반자이신 귀차니즘. 에너지가 딸려서 그렇다. 굳이 필수불가결한 의식주와 일상의 안위에 기여하지 않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집중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연달아 두 편의 특이한 영화를 보면서 이런 나의 경향을 더욱 확실히 인정했다. 김정은의 사랑니와공효진의 미스 홍당무. 영화 이름 앞에 여배우들을 붙여도 충분할 만큼 이 두 편은 그녀들의 영화다. 서른의 김정은은 학원 수학 선생이고, 스물 아홉 공효진은 러시아어 가르치다 부당하게 업글(?)된 학교 영어 선생님. 일단 나이 및 학원을 배경으로 한 활동무대 상당히 유사하다.
그녀들의 유일무이한 관심사, 사랑에서는 어떤가? 정은은 같은 반 첫사랑과 꼭 닮은 열 일곱살 짜리 고딩 학원생을, 효진은 이제는 세월이 흘러 같은 학교 동료 선생이 되었으나, 과거 고3 수학여행을 인솔했던 ex담임 선생님을 사랑한다. 정은은 이가 아프고, 효진은 얼굴이 빨개진다. 둘 다 병원을 찾지만 병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나란히 놓고 보니 둘이는 막가파 배틀 중인 것 같다. 김정은이 좀 나긋나긋하게 맛간 여자 계열로 격하다면, 공효진은 대놓고 막장 왕따 엽기녀 컨셉을 불태운다. 김정은은 심한 나이차의 청소년을, 공효진은 같은 학교 유부남 선생을 사랑하는데, 영화가 이런 사회적 금기의 삼팔선에서 오락가락하는 ‘안타깝고 아스라한’/'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과정이겠거니,,,요런 나의 하찮은 기대감은 영화 시작 5분 만에 박살이 났다. 금기에 대해 조마조마하는 건 영화 보는 나밖에 없고, 정작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런 금기 따위는 발에 낀 때 취급도 안 하고 훌쩍 선을 넘어 어디론가 가버린다. 아주 낯설고 기괴한 곳으로. 따라가기 힘들었다. 정신에도 체력이 있나보다. 심력이 딸려 걍 중간까지 가다 말았다. 내가 미처 따라잡지 못한 먼 곳에서 그녀들은 알을 깨고 나오듯 호된 열병을 치르고 성장을 했다고 한다. 뭔가를 발견했다고도 한다. 그 순간이 감동이었는지 미소였는지 도중에 가다 만 나는 모른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이십대를 보내고 나면, 이런 이상한 여자들이 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걸까? 그녀들보다 한참을 더 나이 먹어버린 난 그냥 그런 덜떨어진 생각 속에 남겨졌고…
어쨌든 괴상한 그녀들이 30대의 기점에서 도착하게 되는 정류장은 “현실인식”이다. 다행이다. 과정은 못 따라갔지만, 이 결론에서 내 눈높이의 상식은 끝에 조금 간신히 영화와 도킹했다. 거기서 그녀들은 비로소 그토록 애닲았던 첫사랑이 마음 속에 간직했던 모습과 다르게 변해있음을 깨닫기도 하고, 나에게 매일 전화하고 싶지 않았던 당신을 인정하고 과감하게 새출발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렇다. 29-30은 성장에 어울리는 나이다. 아니 성장이 강제되는 나이라고 해야겠다. 25-26에 이미 조루해 사랑이니 인생이니를 다 알아 남의 속을 꿰뚫어 보는 꿍한 표정 짓는 것도 어색하지만, 34-35가 되어서도 똥, 된장을 구분 못해 마냥 퇘퇘 거리고만 있는 것도 한심하다. 그 사이에는 분명히 뭔가가 있다. 29-30의 여자들은 그 강을 건너며, 전에 없던 낯선 풍랑과 씁쓸함을 겪게된다. 그리고, 더 이상 젊지 않은 상태에서 많이 늙지는 않은 상태로 변화해간다. 어깨에 주렁 주렁 매달린 한 짐의 ‘현실 인식’과 함께. 그 과정은 지친다. 아홉수라는 것도 결국 그런 필연적 과정을 일반화한 개념이 아닐까.
그 힘든 걸 거쳐낸 그녀들에게 축하를. 서른의 딱지는 고달픈 20대를 잘 보낸 그녀들에게 붙여진 훈장이다. 그 훈장을 달고 다시 새로운 길을 떠나겠지. 현실을 흡수한 힘으로 보다 현명하고 의연해지길. 그리고…좀 평범해지고, 괴상한 사랑들에 빠지지들 말길. 쓸 것도 아니면서, 시트콤 소재만 늘리지 말고들 쫌…!!!!
ps. 사랑니, 미스 홍당무를 비롯 연애의 목적, 번지 점프를 하다, 누가 그녀와 잤을까? 생날선생 등등 어쩌다 대한민국 학교/학원 선생님이 비정상 캐릭터 전담 직업군이 되어 버렸는지. 만만한 게 선생인가? 쩝.
인생을 가까이서 보면 비극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찰리 채플린
정말 그렇더라. 식은땀 줄줄 나는 고민도 친구의 눈으로 보면 지지리 궁상이나 속터지는 우유부단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조금만 떨어져 봤더니, 그 대단하신 햄릿이도 익살과 농담 넘치는 한 판의 희극이더라. 꿈결같은 하룻 밤의 난장이더라. 아 위대하신 ‘거리두기’의 힘이여…
막간에 등장해 꿍~한 분위기나 환기시키던 하찮은 광대들이 죽은 넋 달래 저승으로 보내는 장례쟁이(일종의 보람상조??)로 나서 극을 이끌어간다. 감히 왕자님 친필 일기장까지 꺼내들고 짛고 까불며 죽음으로 이르는 심각한 비극의 과정을 제 3자의 놀이로 낱낱이 재현한다. 그걸 네 명의 광대가 다한다. 지난 10여년의 세월에 걸쳐 진화를 거듭한 < 뛰다>의 시그니처, 인형과 소품의 힘을 빌어. 이제는 여기에 노래가 더해졌다. 정신을 쏙 빼어놓을만치 환상적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이야기를 보는 ‘입장’이다.
“넌 너무 생각이 너무 많아.” => 저 새끼 왜 저래. 속 터져 진짜. 말만 열라 많구. 아 그냥 조용히 입닥치고 살던가, 아니면 가서 확 질러버리던가. 아마도 이게 그냥 평범한 우리같은 사람들이 햄릿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반응 아닐까? 어렵지 않고 폼잡지 않아 딱 와닿는 이 눈높이 해석이 좋았다. 그걸 너무 신나게 속시원히 말해줘서 좋았다.
응용해 보자면…
맥베드 => 왜 그러구 사니? 아둥바둥 해봤자 한 세상인디.
로미오와 줄리엣 => 쯧쯧 애들이 아직 어려서…
리어왕 => 님하~~귀에 들리는 말이 전부는 아니삼~~ 나이값 좀…
비극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정말 무엇이란게 있을까? 유체이탈하듯 저 멀리 떨어져서 괴로운 나를 남인양 바라보며 낄낄대며 웃기라도 할 수 밖에. 삶이란 너무 중요한 것이어서, 늘 진지하게만 말할 대상은 아니라고 오스카 와일드님도 말씀하셨지 않은가.비극의 삶을 살아남는 또 하나의 생존전략.
한 장면 한 장면 너무나 공들인 티가 나서, 같이 본 친구는 그러더라. “저러다 인생 그냥 가겠다.” 그냥 연극 하나 만들어보자, 해서 만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극장 안과 밖의 구분없이 떼지어(?!) 살며, 수 년을 반복해서 만들고 고치고 발전시킨 결과물. 오리지낼리티는 온 인생, 추상적인 의미의 인생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하루 하루, 매 순간 순간을 바쳐 쥐어짜낸 액기스다. 그 진한 액기스를 받아마시고 나니 메마른 정서나마 잠시 회춘하는 듯 했다. 이를 위해 쉼없이 계속 뛰어주는 모든 뛰다님들께 감사를.
유진이가 본 뛰다의 첫 공연 – 또채비 놀음놀이
http://www.youzin.com/blog/?p=248
황혜란양. 어릴 땐 타고난 배우였지만, 어느새 훌륭한 배우가 되었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곧 인간 문화재로 지정받을듯 ㅋ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2007.10. 가로수길 < 블룸앤구떼>
ps. 왠만하면 구찮아서 문화생활 생략하고 살며, 뮤지컬이니 영화니 뭘 바도 시큰둥한데 간만에 오감이 쫑긋서는 체험을 했답니다. 끝나서 아쉽네요. 다시 하면 꼭 보세요~~
미인도에는 미인이 없다. 납득할만한 스토리나 오감자극 쇼킹 육체도. ‘연기 거탑’에 몸 바친 두 여배우를 보며 제 자리 못 찾은 노력이 얼마나 민망한 결과를 낳는지 확인했다. 안 어울려도 열심히는 하더라. 근데, 중요한 문제는 How 이전에 What이다. 자기에게 어울리고 잘하는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닌 자리에서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내 자리는 여기 맞나? 늘 고민하게 되는 내 삶의 FAQ(Frequently Agonized Question).
김영호님, 분노, 욕정, 인내, 질투, 자의식, 패배감 모두 하나의 표정으로 소화해 내신 그대를 한국의 스티븐 시걸로 임명합니다. 조선 최고의 천재 화가가 어찌 무대뽀 강간남으로…조상님들께 민망하다. 쩝. 눈빛이 살아있지 않던, 또 다른 남자배우 한 분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고, 더 알고 싶게 만드는 눈빛, 그런 것을 본 지가 꽤 오래 되었다.
보는 내내 많이, 크게 웃었다. 어이없고 민망해서 그런 거지만, 아드레날린 분비 효과로 본전치기는 했다고 위로해본다.
“결혼이 꼭 이래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결혼이 어떠한 제도여야 한다보다, 결혼에 대해 해결해야 할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 나로서는 난감한 질문이다. To marry or not to marry.. NO, that is not my question. Does he exist or not. That IS THE QUESTION.
“모두가 다 똑같이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남들과 엇비슷하게 사는 흉내를 내는 것조차 버거운 내가 황금같은 주말에 돈 내가며 받아야 할 질문이라기에 또한 난감하다.
관습에의 도발보다는,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기준들에 대해 조금씩 물러서가는=>결국 스스로 무너져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것만큼은 다들 그렇잖아. 남자건 여자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며 우아하게 깃발을 꽂다 점점 이것만은 안된다 저것만은 지키자고 악다구니를 쓴다. 그래봤자 소용없다. 주춤주춤 조금씩 밀리면서, 정신차려보면 알 수 없는 곳에 가 있게 되는 것이지. 내가, 혹은 나만은 절대로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런 곳. 때로는 모든 상상을 초월한 곳. 영화 속 김주혁처럼. 그래서 인생의 지평이 넓어지기도 하고, 산 채로 지옥을 실감하게도 된다. 그래도 저기는 좀 심했다ㅋ 그런데, 보긴 그래도 막상 가보면 그렇게 극악무도한 저주의 불구덩이는 아니랜다. 정말 그런 듯도. 다들 사는 거 봐봐. 그게 위대한 인간의 적응력인지, 합리화 능력인지 종종 난감.
그 놈과 베개를 나누어 베는 남자. 왜 저자가 저 지경에까지 이르러야만 했냐?를 곰곰 생각해 보면, 역시 그녀 없이 살 수 없어서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도발의 탈을 쓴 신파일까? 관습보다는 개인의 선택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건가? 그것이 누군가에겐 고문 행위일지라도? 고통스러워도 참으면 똘레랑스인가? 못참으면 미친 개고. 쩝…너무 큰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막 받아주는 ‘똘레랑스’는 난감하다.
이래야 한다’도 ‘무엇이 좋다’도 아닌 난감한 영화들이 있다. 대신, 생을 박피한 듯한 날 것의 리얼리티를 가치 판단이라는 양념으로 재우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런 난감한 영화들이 내게 주는 보상이었다. 거기에 새로운 경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 보상이 없어서 좀 그랬다. ‘난감’이상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래도 위 두 편이 순정만화보다는 나았다. 민망, 난감이 고문보다는 낫잖아.
영화에 집중하기에 너무 좋은 가운데 줄, 정 가운데 자리라 뛰쳐나올 수 없어 많이 괴로웠다. 극장 좌석의 머피 법칙.
강풀의 < 순정만화>는 명작이다. 2004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쏠로부대’라는 말이 처음 생겨났던 그 때, 회당 평균 페이지뷰 200만 댓글 50만이 넘었다는 < 순정만화>의 염장은 적들이 투하한 초강력 핵폭탄이었다. 창 밖으로 흰 눈이 펑펑 내렸던 날에는 더욱 더. 그 날 두 주먹 불끈쥐고 외쳤던 구호를 간만에 다시 외쳐본다. “우리는 강~철~의 쏠로부대다~”
영화 섹스 앤 더 시티 (Sex And The City, 2008)
소박한 빈티지 결혼 예복과 함께 시청 결혼식장에서 완성되는 대단원. 그 모든 무거움을 벗고 다시 세월 속으로..
섹스와 시티가 날개 달고 떠나간 자리에 패션과 결혼이 내려앉았다. 무겁다. 화려함이 넘쳐 부담만점인 옷들도 더이상 비껴갈 수 없는 commitment도. 휘청 휘청…세월 탓이다. 옷으로 저항하고, commitment로 받아들인다. 발랄함을 반납한 대신 깊어진 고민으로 무장하고 세월과 치열하게 다툰 언니들의 < 전쟁과 평화>!
기승전결의 네 단계를 다 구겨넣고도 모자라 뒷통수 때리는 반전까지 보너스로 압축해냈던 숨가쁜 20분의 리듬감과 캐리의 노트북 액정인지 내 가슴인지에 한 자 한 자 찍혀내려갔던 촌철살인들의 물음표들은 실종되어 버렸다. 포스트잇으로 이별을 통보받은 여자에게는 교통 위반 딱지를 면제해주던 센스과 유방암 치료에 머리가 빠져가는 연상 애인을 위해 기꺼이 자기 머리를 밀어버리는 식의 심장철렁 로맨스도 함께. 하지만 별로 아쉽지는 않다.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그 누가 섹스앤더시티 영화판를 꿈나라 럭셔리 된장녀 교과서라 하는가. 원색의 단청을 입힌듯 강렬한 최첨단 메이크업과 런웨이에서 방금 벗겨온 듯한 명품 의상으로도 깊어가는 주름을 지울 수는 없었으니. 사랑해 마지않았던 캐리의 깜짝한 표정 연기가 영화 내내 불편했던 건 나 뿐었을까? 그 누구도 늙어감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 극렬히 저항하며 노화와의 전쟁에 무한 경비를 지출한 영원불멸 언니 제국이라 할 지라도, 결국 이건 지고 말 전쟁이라는 것. 이야말로 헐리웃의 잘 나가는 네 언니들이 10여년에 걸쳐 몸소 보여주신 초잔혹 리얼리티쇼.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멋진 것이다. 아직도 진행형인 그녀들, 된장녀 최후의 날까지 건배!
그냥 보면 화날 영화. 10년지기 팬이 보면 후일담과 함께 미처 다 하지 못한 이별을 고하게 해 주는 두 시간의 조촐한 작별식. 하지만 더 이상은 스포트라이트 앞에서 만날 일은 없었으면 해. 평화가 깃들었을 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법이자나. Peace, please. 2 u, 2 me.
# 유진이의 섹스 앤 더 시티 포스팅들
유진이가 꼽은 미국 명품 드라마 6 (December 19, 2006)
섹스앤더시티 시즌 6 : ‘감질’의 미학 (May 20, 2005)
바이블 시즌 4 시작 : Four Girls Are Back! (November 5, 2003)
거 참 비교된다. 같은 제품, 너무 다른 포장. 파리 vs 방콕
그 먼 길을 가는 이유는 뭐였을까? 머나먼 베트남까지 흘러 들어가, 낯선 사내들 앞에서 벗고 춤추고 노래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지친 몸을 굴려 거기까지 가고야 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디에 나온 영화 홍보 문구처럼 가슴 속에 간직한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다고? 설마…
사랑은 아니었을 게다. 혼인의 연을 맺고도 서울에 있는 애인에게 미쳐, 몸도 마음도 주지 않는 야멸찬 남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사랑해서는 아니었을 게다. 한 달에 한 번, 남들이 그 의도를 알고 쑤근거릴만큼 달걸이 주기에 맞춰 규칙적으로 ‘생산 거사’를 치르기 위해 군에 있는 남편을 찾아가는 것도 사랑해서는 아니었을 거다. 텅 비어 스산하기 짝이 없는 양반집 대청마루에서 시어머니와 단둘이 상다리 휘어지는 제사상을 올리는 것도, 한 마디 말 없이 베트남으로 떠나 버린 남편 때문에 오히려 소박맞아 친정으로 돌아가도 죽어도 시집의 귀신이 되라는 아버지 말씀에 대꾸 한 마디 못하고 다시 시댁으로 돌아왔던 것도, 3대 독자 찾아 베트남으로 나서는 시어머니 붙잡아 앉히고 대신 제가 가겠다고 길을 나선 그 최초의 계기도 사랑은 아니었으니.
그런데 왜 그녀는 내내 그토록 애타게 남편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그냥 어쩔 수 없어서였겠지. 갈 곳도 없고, 찾아야 할 사람도 없어 그저 그 순간, 그것 밖에는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거겠지.
내 눈엔 그렇게 보이더라. 때가 되어 부모에 등떠밀려 결혼하고, 일부종사의 틀을 깨며 혁명할 의식이나 기반도 없고, 여성의 자주 독립을 외치며 세상으로 뛰어 들어가 독립된 개체로 세상을 헤쳐나갈 힘도 없었던 거겠지. 그냥 남들 사는 대로, 결혼했으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내 남편이고 내가 평생 함께 할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던 거겠지. 그게 당연했던 거겠지.
하지만, 국경도 성별도 나이도 뛰어넘어 황폐한 불모의 사막에서도 활짝 꽃을 피운다는 그 대단하신 사랑이란 것은 그런 곳에서도 싹을 틔우는 것인지 몰라. 동기야 어찌됐든 이 세상에 딱 한 사람 그 사람밖에 없다는 것. 몸이건 마음이건 내가 찾을 곳이란 그 사람밖에 없다는 것. 그게 사랑이라는 것의 원래 의미인지도 몰라.
수애가 간직했다는 그 뜨거운 사랑이란 내가 모르는 그런 사랑이었나 보다. 마음 줄 곳, 관심 가질 곳, 갈 곳의 선택이 넘치는 나 같은 사람은 모르는. 넘치지만 어디든 ‘꼭’ 가야 할 곳은 없어, 베트남따위에 목숨거는 건 미친 짓으로 밖에 안 보이는.
너 나 사랑하냐? 너 사랑이 먼지 아냐?
등돌린 남편은 이렇게 묻는다. 이 매몰찬 질문 앞에 그 밤, 목석처럼 무릎 꿇은 아내는 입술조차 달싹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역만리 타국의 대장정을 통해 온 몸을 던져 절실하게 답한다. 사랑한다고. 뭔지 안다고.
가끔은 대답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너무 먼 길을 찾아가야 할 때가 있다. 별 대단한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꼭 그 사람에게 하고 말아야 하는 그 한 마디 때문에 때문에 아주 먼 길을 가야할 할 때가 있다. 다 포기하고, 보따리를 맨 채 지치도록 걷는다. 그래봤자 당신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말. 왜 그때는 그것이 그토록 하고 싶었을까.
좀 지루했고,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그랬지만 더불어 함께라는 느낌으로 행복했던 영화.
준수 (이동욱)
나는 윤혜진이가 어떤 여자라도 상관없어요.
아무리 더러운 여자라도 사랑할 수 있어요. 난 사랑할 수 있어요.동원 (정보석)
세상은 사랑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니야.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구.준수
그러니까 그만 그 여자를 놔주란 거예요.
사랑해요. 사랑하니까요. 사랑한다구요. 그 사람을…
고래고래 외치며 주저앉아 엉엉 운다.
그 여자의 남편 앞에서. -_-;;;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때깔 좋은 순백의 ‘오타루 어페어’로 문을 여는 이 드라마.
주저없이 “아줌마들의 로망”이라 단정지었었는데, 찬찬히 다시 보니 아줌마들이 이런 상황을 로망할 리가 없다.
아무리 매력만점 영계라도 죽음이 예정된 파멸 일보직전의 막장 인생과 엮이고 싶을 리 없다.
참으로 분명한 것이 없는 애매한 드라마다.
미스터리 멜로를 표방했다는데 미스터리가 흥미진진한 것도 아니고,
재수없어 하면서도 결국은 보게 만드는 치졸한 불륜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단죄본능을 긁어주는 속시원한 복수극이 전개되는 것도 아니다.
욕정에 눈이 멀어 벗어제끼고, 육두문자 날리며 머리채라도 잡으면 오히려 명쾌하련만.
다들 낮게 깔리는 독백 속에 행동을 가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사색을 거듭한다.
이런 걸까? …
아니면 저런 걸까?…
주인공들의 독백 사이사이 수북히 쌓이는 물음표들.
카타르시스라고는 없는 이 지지부진한 상황에,
휴식을 찾는 주말 밤 시청자들은 불편할 수 밖에.
차라리 맨 처음 정보석이 간지짱 수트쑈를 펼쳐보이며 극을 주도하던 시점에는
바람난 유부남들 딱 저래~
소중한 가정도 지키고 싶고, 진정한 사랑도 하고 싶어(=바람도 피우고 싶어)
지켜보기 애처로울 정도로 바쁘게 여기와 저기를 진자 운동 하다가
정작 와이프가 딴 놈이랑 눈이라도 맞을라치면, 뚜껑 열려 길길이 날뛰는
주변에서도 익히 봐온 돼지갈비집 불판보다 더 두터운 철판 깐 모모씨들 씹어주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이혼을 위해 생명보다 소중하다던 아이들까지 포기하겠다는 생뚱과격한 선언과 함께
이야기가 무게 중심이 오연수로 옮겨지고
불륜과 사랑과 아줌마의 때늦은 자아찾기와 벼랑 끝 인생의 비애가 짜장면처럼 뒤엉키면서
24부작이라는 자기가 가진 스토리에 버거운 긴 횟수를 채우기 위해 더디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매 회 살갗에 장마철 더위처럼 찝찝하고 불쾌한 촉감을 남긴다.
계속해서 대답할 수 없는, 답 없는 질문들을 맞닥뜨리게 하니까.
결혼했지만 사랑을 하고 싶다, 애들이 생명보다 중요하지만 나를 찾고 싶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지만, 가정은 깨고 싶지 않다, 사는 데는 돈이 꼭 필요하다…
이런 질문들 앞에 너무 오래 정면으로 노출되다 보면,
여름철 자외선이 피부를 늙게 만드는 것처럼, 마음의 노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머리가 돌아버린다.
준수(이동욱) : 집으로 돌아가세요. 바람 한 번 핀 것 가지고 인생을 망치고 싶어요?
혜진(오연수) : 차라리 날 죽여. 날 죽이고 가. 나 혼자서는 못 살아.
삶에 지친 피곤한 아줌마들이 로망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조금 더 청명하고 단순해야 하지 않을까.
그늘에서 쉬는 것 같은 편안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적당히 피해있다가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는.
아줌마들이 즐기기엔 너무 어둡고
유부남들이 보기엔 불편할 거고
젊은 애들이야 이런 이야기에 뭔 관심이 있겠냐~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들이 한가로운 주말 밤 이런 드라마를 보고 있을까?
결국 질문은 이 애매하고 무거운 드라마를
한 회도 빠짐없이 시청하고 있는 나는 뭐냐는 걸로 수렴된다. -_-;;;
무거움과 불편함을 마다 않는 것은 나와 직접 관련 없는 상황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비슷한 또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빛좋은 싱글살구로 내 나이 또래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는 쏙 빼놓고
때깔만은 번드르해 아짐씨 수준으로 격떨어뜨릴 우려 없는 이런 명품(?) 드라마를 통해
내게 없는 무거운 관계의 어려운 질문들을 시뮬레이션하고 있다.
이렇겠거니.
저렇겠거니.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관계의 무거움을 로망하고 있다.
이제 드라마는 별로 궁금할 것도 없는 결말과 함께
마지막 한 회를 남겨놓고 있다.
이 순간 문득 떠오르는 최승자 시의 한 구절.
허공에 그녀를 방임해 놓은
사랑의 저 무서운 손!
결국 이 드라마는 아줌마가 아니라, 방임된 자들의 로망이었다.
묶일 곳 없는 가벼움에 세상을 둥둥 떠다니는.
쩝!!!!



오타루 너무 멋져~ 불륜의 배경으로는 최고
삽입된 노래들도 다 좋아주시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