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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웹 기획
Joshua Porter| 황현수, 유상은 역| Insight (인사이트)| 2008.11.15 | 236p | ISBN : 8991268528
책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여러 번 빙긋이 웃었다. 나의 첫 번째 책에 있는 내용도 있었고, 두 번째 책에 쓴 내용도 있었다. 반가움과 스산함…모순된 두 가지 기분이 같이 들었다.
나 역시 한계가 한아름인 책의 저자인 주제에, 남의 책에 대해서 뭐라 왈가왈부하기 참 뭐하지만(”너나 잘하지 그랬니?”)~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한계는 ‘장치’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장치는 중요하지만 장치만으로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는다.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를 규명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규명하지 않는 한 웹기획도 웹기획 책이라는 것도 모두 겉돌고 만다.
이 책은 이유라고 주장하지만, 대부분 장치다. 이렇게만 하면 사람들이 개떼같이 몰려들어와 참여하나? 이 답이 될 수 없어서 그렇다. 이유를 극대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유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물론, 장치를 잘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물론, 내 책도 같은 부분에서 반성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웹 기획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라면 모두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할 것이다.
스스로 고민할 포인트와 생각할 거리를 짚어주는 대신, 기존의 방식을 정리하고 “~를 하라”고 말하는 태도도 다소 구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이 배웠지만 거부감도 많이 들었던…그리고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 비슷하게 되어버린 제이콥 닐슨 박사님의 유저빌리티 10계명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 책의 챕터 제목들도 죄다 “~하라”군. (ex) 소셜화 – 관계를 맺고 공유하게 하라 -_-a 꾸벅
하지만 이 책은 시종일관 편안하게 끝까지 읽힌다. *적어도 나에게는* 만족스러울 만큼 깊이 파고드는 책은 아니었지만, 저자의 경험이 잘 녹아져 있고 로컬라이즈 이슈가 다소 적은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어 볼 만 했다. 특히, 너무나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두께와 전개 방식이 무거워 정작 읽지 않게되는 책들에 비하면 책값에 대한 ROI는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담없이 흥미를 가지고 끝까지 읽을 수 있다는 것, 어떤 책이 가질 수 있는 너무나 훌륭한 장점이다.
원제는 Designing for the social web인데, 디자인 -> 기획으로 번역이 되었다. 정작 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UI 디자인도, 웹기획에 대한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를 포함해 사용자의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소셜한 웹사이트를 기획하고 운영할 때 고려해야 할 전반적인 문제들을 다루었으며, 사용자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참여시키느냐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앞쪽에는 사용자와 대화하는 법도 몇 챕터에 걸처 다루고 있어, 서비스 기획자가 아닌 CS담당자나 운영자, 고객 커뮤니케이션, 리스크 매니지먼트 담당자들도 참고할 만 하다.
그만큼 구성이 두루두루에서 멈추고 마는 아쉬움도 있지만,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 사용자 참여를 기획하는 분들은 읽어보면 여러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내 직무 자체가 참여 기획쪽이 아니라 큰 감흥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슈와 포터는 블로그 보카르도(bokardo.com)의 저자이며, UI 전문가다. 예전부터 자주 봐왔던 블로그라 책이 나올 때부터 기대가 많았다. 뉴라이더스답게 책 표지도 시크하고(너무 좋아라~한다), 제목도 유혹적이라 실제로 번역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재미있게 읽고나서, 나는 내가 전에 있던 어떤 세계를 떠나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내가 새로 마주한 푹 담그고 있는(혹은 싶어하는) 이 새로운 세계의 풍경이 읽어내기는 어렵지만, 얼마나 멋진 것인지 새삼 실감하게 되어 뿌듯했다. 물론 그 세계 속에는 이 책에서 소셜 매개체(Objects)라는 명칭으로 휙 지나가고만 징글징글한 데이터들이 득시글거린다.
좋은 책을 만들고 보내주신 인사이트에 감사합니다. ^^
김훈 선생님의 신작 에세이집을 읽었다. 글의 배경이 언제든, 문장의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었다. 검은 겨울 밤을 가르며 휘몰아치는 흰 눈보라처럼 살벌하고 준엄한 문장들이 가득했다. 그 문장들은 실체와 말 사이의 구천을 떠돌며, 그 어느 쪽에도 안착하지 못한 독한 아귀들 같았다. 글을 쓴다는 것이 꼭 이렇게 무겁고, 무서운 일이어야만 하는지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나온다. “하여간 사내들이란…”
어쩐지 김 훈 선생님은 고집 센 어린 남자애 같다. 그 치열한 사유의 깊이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성숙한 어른이라는 느낌이라는 들지 않는다. 일부러 성을 내고, 일부러 까칠하고, 일부런 쎈 척 어른의 흉내를 내는 똑똑한 어린애 같다는 혐의가 든다. 온갖 폼 잡고 사람들 모아놓고 근엄한 표정으로 공자왈 맹자왈 하다가도, 뒤로 가서는 장난스런 눈빛으로 배시시 농도 건네고 언니들의 추파에 응수도 하며 낄낄거릴 것만 같다. 그러다가 금새 옷섭을 여미고 단정해지기 놀이에 심취하고.
어느 날 술 마시는 자리에서 내 친구들에게 여러 소방장비들의 기능과 작동방식을 열거하면서, 그 기능 하나하나가 어떻게 인간의 생명과 연결되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도심을 질주하는 소방차가 어째서 아름다운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내 친구들은 별 감동이 없었다. 술 마시는 자리에서 왜 불 끄는 얘기를 하느냐고 나를 나무라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실망했고, 친구들이 내 말을 알아 듣지 못해서 답답했다.
< 바다의 기별> 중 –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75p
술자리에서 혼자 들떠 열변을 토하다,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삐쳐버리는 남자. ㅋ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 분을 두 번 뵈었다. 두 번 다 1:1이었다. 그렇다고 소개팅은 아니고ㅎㅎ. 그런데, 정작 ‘한국 문학의 벼락 같은 축복’이자 동시에 ‘벼락 같은 베스트셀러’였던 그 분의 책은 이번에야 처음으로 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도 새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와 문장과의 거리, 그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헛된 열망, fact에의 집착, 과학적인 글쓰기, 조사의 어려움, 몸으로 밀고 나가는 세계, 단독자, 밥벌이의 중요성과 지겨움, 보편성과 개별성…이미 신문 기사나 인터뷰를 통해 반복했서 접했던 레퍼토리들이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독대해 직렬연결로 전달받아 더 선명하게 각인됐고. 다른 책들은 어떨까? 결국 그것들 역시 다른 대상에 투영된 같은 세계의 응용일 것이다. 개별적이자 단독적이며 구체성을 띈 fact에 기반한 응용.
어쨌든 나로서는 문학보다는 어떻게 살아야/살아남아야 할까가 더 고민이다. 그런데, 구구절절한 책 속 문장보다는 그 분 작업실 칠판에 적혀져 있던 몇 줄의 근무 수칙이 번쩍~와 닿는다. 같은 근로자로서의 연대감이 너무너무 살갑다. 그래. 근무를 잘 하기 위해서는 근무 수칙을 지켜야 한다. 2009년에는 새해의 결심 대신 새해의 근무 수칙을 만들어 봐야겠다. 어렵고 혼란한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단순하고 명징한 근무 수칙을. 또 한 해가 바짝바짝 끝을 죄어온다.

작업실 근무수칙


나는 컴퓨터를 다룰 수가 없지만, 컴퓨터로 그을 쓸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다. 연필로 쓰기는 몸으로 쓰기다. 연필로 글을 쓸 때, 어깨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작동되는 내 몸의 힘이 원고지 위에 펼쳐지면서 문장은 하나씩 태어난다. 살아있는 몸의 육체감, 육체의 현재성이 없이는 나는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 글은 육체가 아니지만, 글쓰기는 온전한 육체노동인 것이다.
< 바다의 기별> 중 – ‘무너져가는 것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것’ 111p




나는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나는 이런 문장을 이순신 장군의 < 난중일기>에서 읽었습니다. 거기 보면 그 분이 군인이기 때문에 사실에 정확하게 입각한 군인의 언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인이 아니면 쓸 수가 없는 문장입니다. …(중략)
저는 장군님께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분이 돌아가신 날이 되면 꼭 노량에 가서 소주 한 병을 놓고 절을 하고 돌아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노량은 남해도 입구인데, 아주 경치가 좋습니다.거기 이락사(李落詞)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이순신이 바다로 떨어져 죽은 사당인데, 그 이름도 참 이순신답죠. 아무런 수사학이 없고 떨어질 ‘락’자를 써서 이가 떨어진 바다라는 뜻이죠. 난 전국 사당 이름 중에서 이락사가 제일 잘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가 죽은 바다다. 이런 단순성이 온갖 슬픔보다 더 거대한 슬픔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저는 요즘 이런 명석성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습니다.
< 바다의 기별> 중 – ‘회상’ 141~144p



이제 풍륜은 늙고 병든 말처럼 다 망가졌다. 2000년 7월에 풍륜을 퇴역시키고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 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
< 바다의 기별> 중 – ‘자전거 여행’ 서문 187p


‘A는 A다’라고 말하면 분명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하나마나한 말입니다. 사람이 입을 벌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사전이라는 것은 동어반복의 거대한 시스템입니다. 이 동어반복의 지옥을 벗어나서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모습을 직접 포착하고 그것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문학과 자연과학의 목적은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바다의 기별> 중 – ‘말과 사물’ 156p


내 소설에는 종교나 내세나 구원이나 피안이나 이런 것들이 나오지 않고, 오직 이 해탈하지 못한 중생들만 나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득도하지 못한 중생만 저의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소설로 쓸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좁은 것이죠. 득도하지 못한 중생 얘기만 쓰는 아주 협소한 영역을 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 인간의 안쪽에서만, 인간의 언어만을 붙들고 살아야 되니까. 그런 협소한 자리의 부자유를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 안에서만 한 줄 한 줄의 글을 쓰다가 때가 되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 바다의 기별> 중 – ‘말과 사물’ 168p

왠 분위기?! -_-;; 쪽팔리당… 그래도 가문의 영광^.^V
환란의 때야말로 사람은 일상의 잠에서 깨어 영혼 속으로 깊이 침잠해 표면 아래에 숨겨진 본질을 갈구할 드문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의지하고 싶어서. 위로받고 싶어서. 혹시 속세에는 도저히 없는 구원이 거기 숨어 있는가 싶어서.
이럴 때야 말로, 너저분한 것들을 털어내고 옥석을 가릴 수 있게 된다. 감정의 사치를 위해 쓸 소소한 악세사리 비용까지 바닥나는 절망의 상황에서만이, 내 인생에 도저히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온전히 그것에만 경제적으로 마음을 쏟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진정한 위로, 진정한 의지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지 왜곡없이 가늠할 수 있다.
심란함의 쓰나미를 몰고 온 9시 뉴스를 보면서, 하루 분의 전국민적 패닉에 마침표를 찍는다. Enough. 방에 와서 란딩 준비물을 챙기는데 날이 추워 어딘가 쑤셔둔 바람막이를 찾다가 문득 이 책을 발견했다.
눈이 번쩍 뜨여졌다. 톨스토이가 인생의 경구들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매일 매일 몇 쪽씩 적어내려간 책이다. 10월 24일, 과연 어떤 말이 쓰여져 있을까? 대문호 톨스토이는 무엇을 사색했을까? 수 백년 후 오늘 이렇게 많은 이들이 고통에 몸부림치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을까? 한쪽 반 분량의 글을 읽으며 새삼 ‘위대함’ 역시 우리 삶에 필수불가결한 한 요소임을 깨닫는다. 늘 나는 한 명의 인간,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수 백 페이지의 엑스레이로 찍어놓은 듯한 도스트예프스키를 경배했지만, 결국 돌아올 길이라 해도 인간의 탈을 쓰고 갈 수 있는 그 끝까지를 가 보았던 극한의 실험성을 찬양했지만, 이제 나는 안다. 인생에는 예술만큼이나 스승이 필요한 것을. 뻔한 인생의 교훈을 뻔하지 않게 들려주며 겸허히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위대함의 영역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늦은 밤, 마음을 담아 한 자 한 자 타이핑해 본다. 평화로워진다. 내일 아침에는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고, 그러므로 또 다시 세상살이의 어려움에 치를 떨지라도. 하루 분의 비타민을 삼키듯 당분간 저 위에서 처방해 주신 위대함을 섭취해 봐야겠다. 매일 매일 꼭꼭 씹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 10월 24일
1
만약 우리 모두의 생명의 근본이 같지 않다면, 우리가 늘 경험하는 동정이라는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2
누군가의 분노를 진정시키려면, 예를 들어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분노라고 하더라도, 화를 내고 있는 사람에게 “하지만 저 사람도 불행한 사람 아닌가!”하고 말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빗물이 불을 끄듯, 곧 동정은 분노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 사람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면, 자신이 이미 그 고통을 상대방에게 주었고, 실제로 상대방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민하거나 어려움과 결핍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나 때문이라고 중얼거리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나머지 일은 어떻게 되든 그것만으로도 분노가 사라질 것이다.
쇼펜하우어3
똑바른 길, 또는 우리가 따라야 할 행동의 규범 – 그것은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멀리 떨어져 있다면,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느다면, 그것은 행동의 규범이 될 수 없다. 도끼자루를 깎는 목수는 눈앞에 견본을 놓고 일한다. 그는 자신이 깎고 있는 도끼자루를 들고 요모조모 뜯어보며, 새 자루가 완성되면 얼마나 똑같은지 알아보기 위해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본다. 그것처럼, 타인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한 것과 같은 감정을 품는 현인은, 확고한 행동의 규범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려 하지 않는다.
공자4
남을 욕하며 그와 다투고 있을 때, 너는 인간은 모두 형제라는 것을 잊고 있으며,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대신 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너는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다. 왜나하면 네가 맨 처음 신이 창조한 선량하고 자비로운 인간이 아니라, 몰래 다가가서 먹이를 덮쳐 물어 죽이는 야수로 변한다면, 너는 너의 가장 소중한 재산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너는 지갑을 잃으면 크게 소동을 피우면서, 어찌하여 너의 가장 소중한 재산인 ‘마음의 선량함’을 잃고도 아깝다고 느끼지 않는 것인가?
에픽테토스5
‘너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많아.’ 확실히 이 말은 네가 사는 데 지붕 역할은 못하더라도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하다.6
너는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고 슬퍼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떠올린다면,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7
진정한 동정이 시작되는 것은, 우리 상상으로나마 괴로워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진정한 고통을 대신 경험해볼 때이다.
스키니 비치 (앞서가는 그녀들의 발칙한 라이프스타일) Skinny Bitch
로리 프리드먼, 킴 바누인| 최수희 역| 밀리언하우스| 2008.04.01 | 232p | ISBN : 978899164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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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들은 여기저기 발길질을 해대며 미친 듯이 몸부림친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다치지 않기 위해 작업자들은 요동치는 소의 척수를 머리 뒤에서 칼로 세게 내리쳐 끊어버린다. 그 고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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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소고기 정국이 막 불붙던 시점 만나게 된 이 책.
스키니 비치라면서,
책의 맨 끝에 보면 정작 다이어트 비법은 소개하지도 않았으며
애시당초 그런 거 소개는 관심도 없었다고 생깐다.
그건 그냥 혹하게 만들어서
다소 재미없게 느낄 수도 있는 올바른 먹거리 전도를 위한 삐끼 작전일 뿐이었단다.
이론~!!!
한마디로, 배배배 …배반이다.
말라깽이 비치로 새로이~ (눈 반짝반짝★_★) 재탄생할 수 있다는 구언의 복음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가엾은 중생에게 책 다 끝난 이제와서 이 무슨 해괴한 망언이냐.
게다가 더 황당한 사실.
이 책을 읽으면, 밥상 위에 먹을 것이 거의 없어진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죄다 독약이거나 죄많은 인간이 짊어진 호러블한 무한탐욕의 증빙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자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여기는 구멍 뻥~ 뚫린 죽음의 타이타닉호다. (꼭 그렇게 쓴 건 아니지만)
침몰의 공포를 느낀 인간들이 죄다 뛰쳐나와 아둥바둥 기울어진 갑판을 기어오르며 이 한 몸 탈출을 도모한다.
웰빙이라는 값비싼 구명조끼와 유기농이라는 최고 경쟁율 구명보트를 차지하려고 발버둥치며…
이런 풍경을 SATC의 캐리가 컬럼으로 쓰면 어떤 삘이 날까? 바로 스키니 비치 삘이겠지.
경쾌하게 거침없이 재미나게. 전직 모델이었다는 예쁜이 둘이 글까지도 참 잘~ 썼다.
게다가 끔찍한 도축 과정이라든지 음모론에 정부 차원의 조직적 결탁도 자유분방하게 까발려 주신다.
왜 그런 애들 있자나.
겉보기엔 인형처럼 이쁘장한데 건들건들 농이라도 걸라치면 바로 앞차기 날려주시는
겁대가리없이 깡 좋~고 머리는 더 빨리 도는 완소 언니들.
이거저거 뭐 다 좋은데, 문제는 actionability다.
이 책대로 차 떼고 포 떼면 먹을 거라곤…T_T 거의 없다.
게다가 추천 식단이라고 몇 페이지 늘어놓은 게 도당췌 와닿아야 말이지. (머나먼 외국의 먹거리)
자연성분 그대로 정제되지 않은 켈트해소금-> 어디서 팔까요???
레드어이언을 넣은 전곡 베이글 -> 이거 뭔지 아시는 분~~?
렌틸콩 수프와 익힌 케일 -> 이거는?
방금 짠 신선한 오렌지주스 -> *방금* *짜야* 된다는 거.
식물성 가짜 닭고기로 만든 햄버거 고기 -> 어디서 파는데??
블루베리, 아몬드, 두부 스크램블 -> 요 정도가 그나마 접수 가능한 수준
골프도 치러다니고(요건 책에는 없으나 내 귀에만 들린 소리^^)
비싼 옷도 퍽퍽 잘 사면서 왜 그렇게 짜치게 구냐며
유기농에도 돈 좀 들이라는 데, 이건 돈이 아니라 근본적인 내 생활 환경의 문제다.
집에서의 먹거리야 엄마 뎀비 손에 달려있는데, 가까스로 천신만고끝에 그들을 설득한다 해도
일단 집에서 먹는 밥이 한 달에 몇 끼가 되야 말이지.
밖에 나가서 사 먹는 밥에 이거 가리고 저거 가리면…남는 것은 외로운 왕따의 길.
그리하여 나의 절충안은 육고기 탈출 대작전.
고기 국물도 먹고 가끔 아침 김밥에 햄도 먹는 매우 느슨한 채식이라고 하기도 거시기한
아주 간~~신히 육고기만 겨우 피하는 형태의 머라 이름도 없는 이거.
(베지, 모시기 모시기 되게 많던데~~난 NONMEAT라고 이름붙여본다)
근데 이상하게 그렇게 힘들지 않다. 너무 너무 이상하리만치.
혼자서도 매끼 고기를 구워먹던 원단 육식주의자였던 내가.
너무나도 맛있는 광주 식당 김치찌게의 돼지비계를 골라내는 날 보며 “유진이 변했구나” t_t
그래도 일본가서…방목해 키웠다는 마블링 너무도 선명한 소고기 구이, 그리고 …눈물을 머금고 아니 흘리면서도
부들부들 떨면서 젓가락을 접게 만든
다시금 되새기며 움찔하게 만들었던, 나를 움직인 표현은 바로 이거였다.
you’re what you eat.
따라서 니가 고기를 먹으면, 너는 그들이 느꼈을 슬픔과 분노와 고통을 함께 먹는 것이다.
그래서 요새 육고기를 좀 피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채식은 아니고),
그러던 어느 날 장어 초밥을 너무도 맛나게 먹는 것을 본 친구의 한 마디.
“장어의 슬픔과 분노와 고통은 어쩌고?!”
“그래도 장어는 좀 덜 느끼지 않을까????” 힘없는 반격…흑.
채식하면 살이 빠질까? 온순해질까? 행복해질까?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소, 돼지, 닭들의 성난 영혼이 내게서 떠나갈까?
채식은 도깨비 방망이~ 만병 통치약~ 아싸. 채식만 하면 수리술술 인생이 풀려요 이게 바로 시크릿.
살아야겠기에 살아있는 또 다른 것의 생명을 “앗아” 씹어 삼켜야 한다는 존재의 기본 원리가
좀 거시기하게 다가오는 밤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저/왕은철 역 | 현대문학 | 원제 A Thousand Splendid Suns | 2007년 11월
이 여자들은, 너무 많이 참는 것이 아닐까? 여자들은 때로 너무 많이, 너무 오래 참는 것이 아닐까?
560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쉬지도 않고 단숨에 읽어버렸다. 소설은커녕 런닝 타임 2시간짜리 영화도 끝까지 보기 힘든 요즘 내 추세를 보면 놀라운 진도다. 현실이 이 지경이니 한가로운 가공의 이야기, 먼 나라 딴 소리에 집중할 수가 없다. 정치 지망생이라도 되는 듯 뉴스를 뒤져보는 것을 제외하면 오로지 골프 하난데, 일단 채를 잡으면 아무 생각 없이 공만 치게 해 주니까 그렇다. 모르핀 대용이랄까? 그만큼 강도 높게 무념무상의 경지로 몰입하게 해 주지는 못하는 심심파적성 여가는 아웃이다. 그런데 아주 오래간만에 집중하게 해 주는 대상을 만나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저 먼 나라 아프가니스탄의 포화 속으로 들어가 진한 감동과 눈물의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는 그저 꿈 많던 소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여인이 되어야 하는 잔인한 순간에서 시작한다. 축하도, 준비도, 지켜주는 이도 하나 없이. 모두들 음흉한 털복숭이 손을 내밀어 찬란한 어린 날의 꽃밭에서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무저갱(無底坑)의 낭떠러지로 소녀들의 등을 떠민다. 영영 돌아올 수 없도록.
그 중 한 명은 마리암이다. 첩도 못된 가정부의 딸로 태어나 집안에서 쫓겨나 외딴 곳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15세 소녀. 그녀는 목요일마다 찾아오는 아버지를 애타게 그린다. 정해진 시간에 그가 안 올 것 같으면 애가 타 몸이 아플 정도로. 엄마에게는 늘 넌 후레자식이니 꿈깨라는 식의 시니컬한 핀잔만 듣지만, 그래도 열 다섯 마리암에겐 늘 저 편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름다운 선물을 가져다 주는 아버지와의 짧은 만남이 인생의 전부다. 하지만 한 걸음 더 아버지의 생활 속으로 다가가는 용기를 냈던 바로 그 순간, 호화로운 저택에서 세 명의 부인과 11명의 자식을 거느린 아빠에게 마리암은 철저히 외면당한다. 그 순간 그녀의 동화 속 세계는 산산히 부서지지만, 이제 그녀 앞에는 그런 외면 정도는 아주 사소한 추억으로 지워버릴 비극적인 운명이 펼쳐져 있다 .
다른 한 명의 여인은 라일라다. 의식이 깨인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여자라도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 나간다. 하지만, 그래봤자다. 전쟁의 포화 속에 맞이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부모의 죽음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원치 않는 이와의 결혼, 히잡보다 더 두꺼운 장막으로 가려진 집, 그 고립된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폭력까지. 그녀에게도 생의 잔인한 손톱은 비켜가지 않는다.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의 불운과 비극의 점철…
이 모든 일을 겪는 이들의 나이가 불과 14,15세라는 거. 스물 살을 갓 넘기며 주인공들은 이미 산전수전에 앞니까지 빠져버린 몇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고, 서른이 넘으면 아예 삶의 풍상에 폭삭 늙어버린 쭈구렁망탱이로 시들어버린다. 발랄한 소녀시대의 로망에 빠질 새도 없이 ‘엄마’와 ‘아내 ‘라는 봉건의 족쇄에 꽁꽁 묶인 채 살아가지만, 바로 이런 것이 그 대단하다는 여자의 위대함일까? 엄마 품에서 어린냥이나 부릴 그 나이에도 무엇 하나 외면하지 않은 채, 무거운 삶의 짐을 어깨에 고스란히 지고 한 걸음씩 내딛어간다. 한탄도 없이, 희망도 없이, 그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너무 오랜 시간 어떤 수위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가해진 고통은 비명 같은 것으로는 표현이 불가하다. 무표정은 그녀들이 지나온 극악한 고통의 시간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 모든 것을 다 보아버린 눈 속은 텅 비어있다. 그녀들이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는.
무려 17살 나이차가 나는 이 두 여인네가 한 남자의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관계로 만나, 미움을 넘어 마음의 공감을 이루는 것은 이 긴 소설의 반을 훌쩍 더 넘긴 338페이지부터였다 거기까지 암흑의 터널을 뒤쫓아오면 함께 지쳐버린 나로서는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 다행이라고 당신 둘이 만나 서로를 돌보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물론 그 이후로도 그네들의 삶이 평탄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함께 함으로 쥐게 된 한 줌의 희망은 더 큰 희생과 고통을 불러올 뿐이다. 하지만, 이 순간 살아있다는 감동으로 그들은 기꺼이 그 모든 것을 감내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므로.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다 걸러지고 남는 것은 진부하리만큼 평범한 이 한 톨의 명제다. 하지만 지독한 고문의 검증을 거친 진실의 순도는 닥치고 오롯이 접수하게한다. 정말로, 정말로 저것은 진실이었구나…
어떻게 보면 누구도 주목할 필요 없는 하찮고 평범한 여자들의 삶이다. 치열한 현실 의식으로 혁명을 주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생이 몰아붙이는 데로 끌려다니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죽을 듯이 목숨 거는 거대한 역사의 포화와 거대한 이념들 속에서 한 점보다 못한 존재로 사라져 버리는 이들. 하지만, 공산당도 소련도 탈레반도 미국도, 그들이 불러온 피비린내 나는 전쟁도 이루지 못한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은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한 여자의 진심이었다. 남은 이들은 그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끔찍한 불행의 순환과 대물림에서 벗어나게 한 그녀를 기억하며 함께 모여 더 큰 희망의 우물을 판다. 이렇게 그들의 마음에는 그렇게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비추기 시작한다. 길고 긴 터널의 끝에서 만난 그 빛이 너무 눈부셔 난 펑펑 울고 있다. 하지만, 이 빛은 너무도 따사로워 다시 그 강물같은 눈물을 마르게도 한다. 고작해서 찜질방에서 원적외선을 갈구하는 나, 이런 빛을 다시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두 권의 책에 추천사를 썼습니다. 한 권은 아끼는 후배와의 인연으로 , 또 한 권은 어느날 날라온 출판사 인사이트의 요청으로. 후배의 책은 다 읽지 못했지만(읽어도 이해 못할 디테일) 인간과 그의 레퍼런스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출판사가 요청한 책은 교정본을 리뷰해보니 유쾌 상쾌 통쾌했습니다. 후배의 당연히 좋을 거라고 확신했고, 인사이트의 책은 읽으면서 많이 웃었어요. 낄낄낄…이렇게.
추천했던 이유는 다르지만, 두 권 모두 해당 분야 선수들의 책입니다. 책이 나온 후 당연히 둘 다 여러 곳에서 추천받으며, 잘 나가고 있구요. 오늘 현재 YES24 일간 베스트기준 개떡소프트웨어은 개발방법론 1위, 플렉스 3는 웹/네트워크 프로그래밍 1위를 기록하고 있네요. 축하드립니다.
후배 책에 쓴 추천사는 편집 과정에서 짤렸지만(추천사가 줄을 이어~), 제 블로그에서 되살려 봅니다. 진욱이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르네요. 2004년 가을? 신림 사거리 던킨 도너츠 앞 횡단보도에서 서성서성 나에게 다가와…”혹시..유진닷컴?” 아, 이 놈의 유명세 어쩌면좋아. ㅎㅎㅎ 처음 먹어본 곱창에 급하게 마신 소주가 얹혀 얼굴 벌개지고 정신 몽롱해도 누나 앞이라고 자세 하나 안 흐트려뜨리고 꼿꼿이 앉아서 조근조근 얘기건네던 갓 병특 마친 애기가 이렇게 금방 커서 회사도 차리고, 청담동 알토란 땅으로 사무실도 넓히고, SM7 몰고 와 집에도 데려다 주고, 책도 내고 했네요. 하지만, 추천사에야 고상하게 표현해서 “수 많은 밤샘 작업과 고통스런 시행착오”라고 했지, 여기 오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개고생이었는데요. 이제 드디어 수확의 계절이 돌아온건가? 그런데 처음 본 그날 부터 진욱이는 내내 플렉스 타령이었어요. 앞으로는 플렉스가 뜰거라고… 자기는 플렉스를 할거라고. 그 하나를 밀어부쳐 여기까지 왔네요. 꿈★은 이루어졌나?
이걸 보고 있을 진욱아. 앞으로도 계속 화이팅!
RIA, FLEX 전문 컨설팅 및 개발 그룹 바닐라로이 홈페이지 http://www.vroi.net
: 웹 2.0 인터페이스 개발, 구축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적극 컨택해 보세요.
어쨌든 이렇게 또 두 권의 책을 만났습니다. 인연이란 이런 건가봐요. 급작스러워도, 세월 속에 묵어도 때론 같은 일을 하게 만듭니다.
소프트웨어, 누가 이렇게 개떡같이 만든거야 (사용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유쾌한 통찰,Why Software SUCKS…and what you can do about it)
데이비드 플랫| 윤성준 역| 인사이트(insight)| 2008.04.03“요즘 소프트웨어는 개떡같습니다.”라는 첫 줄에서부터 웃음을 터트렸다. 시종 일관 정곡(?)을 찌르는 직설적인 표현과 생생한 예시들로 사용자 관점에서의 소프트웨어 설계의 고정관념들을 파헤친다. ‘정신나간 전문가들이 제정신을 찾게 해 달라는 울부짖음’ 속에서 화면 스토리보드에 아무 생각없이 자바스크립트 확인 얼럿창과 메뉴를 덧붙이는 내 자신의 습관을 되돌이켜 보았다. 누구나 쉽게 ‘사용자 관점’이라는 표현을 남발하지만, 정말로 사용자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오히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일 수록, 업계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일 수록, 때로는 사용자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할 수록 서비스를 사용하는 진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는 멀어지기 십상이다. 저자는 온갖 복잡한 규칙과 오바된 고민들 속에서 한없이 높아진 고상한 눈높이를 가차없이 그러나 매우 유쾌한 방식으로 ‘팍팍~’ 낮춰준다. 이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인터페이스의 세상이 왜 이리 생생하고 흥미로운지!
나열식의 딱딱한 how-to라기 보다는, 저자의 입담을 따라 유쾌하게 읽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소프트웨어와 화면 설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책. 스티브 크룩씨의 유저빌리티 명저 [Don't Make Me Think] 이 후 읽는 즐거움과 알찬 영양가를 고루 갖춘 ‘통하는’ 책을 만나 반갑게 추천한다.
정유진 < 정유진의 웹 2.0 기획론>의 저자 http://www.youzin.com
리뷰했던 개떡소프트웨어 교정본…넘겨 보며 너무 많이 웃었다.
FLEX3 KNOWHOW BIBLE
바닐라로이| 대림| 2008.03.31리치인터넷애플리케이션(RIA)은 더 이상 몇몇 앞서 나간 이들의 실험적인 테스트나 웹 2.0의 멋드러진 구호가 아닙니다. 인터넷 뱅킹, 영화 예매와 같은 매일 접하는 경험의 일부로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고 들고 있습니다. 플렉스(FLEX) 역시 기존 웹의 한계를 무너뜨리며, 웹에서의 경험을 보다 생활 친화적인 형태로 바꾸어 가고 있는 선두 주자입니다.
[Flex3 Knowhow Bible]을 통해 수많은 실제 프로젝트를 통해 초창기부터 한국 플렉스의 발전과 함께 한 (주)바닐라로이의 노하우가 공개됩니다. 수많은 밤샘 작업과 고통스런 시행 착오의 과정을 통해 정제된 플렉스의 엑기스를 담은 소중한 산출물. 플렉스의 가장 진화된 모습을 실용적인 과제와 솔루션, 바닐라로이만의 노하우의 형태로 가장 간결하고 정확하게 펼쳐보이고 있는 이 책은 미래의 인터넷을 바로 지금 구현시킬 수 있게 도와주는 훌륭한 가이드가 될 것입니다.
정유진 < 정유진의 웹 2.0 기획론>의 저자 http://www.youzin.com
Q : 임헌영 선생님의 역할이 크셨을 것 같은데요.
리영희 선생님 : 임헌영 씨는 뛰어난 문학비평가이면서 해방 후 한국 현대사를 굉장히 연구하고 있어요. 내가 살아온 기간보다는 훨씬 짧지만 대개 내가 문제로서 취급했던 일들을 잘 꿰뚫고 있는 사람이예요. 문제제시가 아주 좋았지. 임헌영 씨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어요.
그러면서 대담만 가지고는 부족한 것이 있어요. 구술한 것 중에 문장이 안 되거나 빠진 내용들이 있었지. 문장을 고치고 빠진 부분들을 질문과 관계없이 집어 넣었는데, 필요한 것을 전부 고쳐서 충실하게 만드는 데 1년이 걸리더라구. 쓰지 못하는 손을 가지고 아주 고생을 했지. 하루 종일 손을 들썩이며 써도 200자 원고지에 한 10장. 원고지 두 세 장을 쓰면 손가락이 다 구부러지지. 구술한 것이나 남이 해 준 것 보다 내가 수정하고 고쳐 넣은 것이 훨씬 많았어. 그러니까 오래 걸렸지.
우리 집사람은 그만 두자고 했어. 원고 빨리 써달라고 재촉을 받아 밤을 세우다 뇌출혈이 왔는데, 또 이걸 붙잡고 있으니까 집어 치우라고 했지. (웃음)
Q: 그냥 대화해서 나온 책이 아니네요
리영희 선생님 : 아니야. 절대 아니야. 구술만 해서는 책이 되지 않더라구. 나는 문장의 아름다움을 굉장히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문장의 미라는 것은 고치고 또 고치고 하면서 만들어지는 건데, 기계로 타다닥 쳐버리니까 안 되겠더라구. 얼마나 다듬었는지 몰라.
Q: 그런데 꼭 정말 대화를 듣는 것처럼 쉽고 편하게 느껴져서, 역시 대담을 글로 옮기니 읽기가 쉽구나 하는 반응들이 많이 있어요.
리영희 선생님 : 그걸 쉽게 마치 정말로 대화로 한 것처럼 문장을 만든 거야. 읽는 독자를 상상을 하면서 읽기 편하게 대화를 하는 것처럼 만든 거지. 나는 과거에 그런 문장을 많이 써왔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이럴 때 어떻게 가볍게, 즐겁게 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서 그렇게 문장을 만든 거예요. 대담으로 누가 책을 만들더라도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렇게 쉽게 느껴지는 책이 되지 않아요.
선생님을 찾아뵈었던 2006년 3월.
새로운 것들은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데,
Web 2.0은 벌써 난리라는데
시간은 없고, 몸은 지치고, 아무도 안 도와줘서 울고 싶고,
무엇보다 스스로 체감하는 내 능력의 한계가 분명해
좀비처럼 밤과 낮을 헤매며 책을 쓰는 건지
저주받은 미로를 헤매는 건지 모를 제자리돌기를 하고 있었던 때
선생님의 저 말씀,
뇌출혈로 마비된 손을 들썩이며 하루 종일 써도 하루에 원고지 10장….
몽롱했던 내 정신에 누군가 찬물 한 바가지 끼얹고 가는 기분이었달까?
부끄러웠고
무엇이 노력인지 어디까지를 한계라 말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었다.
그 날은 나에게는 무언가 달라진 날이었다.

<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 한길사 (2005.3)
< 전환시대의 논리>의 저자, 사상의 은사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 한국 최고의 지성, 시대를 움직인 지식인
그 방면으론 머리가 텅 빈 나, 선생님 이름앞에 붙는 거창한 수식만으로도 기가 죽었었지만
멀리서 왔다며 고생했다며…너무나 자상하고 해맑은 모습에 감동받았고
거창한 것은 거창하게 사소한 것은 사소하게…모든 것을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작은 것 하나 하나 수치와 사례로 말씀하시고, 수치를 물어보시는 몸에 배인 실증적인 대화법은 물론
(대충 물어보시는 거겠지 하며 앞 뒤 안 맞는 숫자를 대면 날카롭게 모순을 지적하셔 흠칫할 정도로…)
70이 넘으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개방적이신 태도…
검색이니 지식인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시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시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고 감동받았었다.

< 한겨레 신문> 창간기념 북한 취재기자단 방북기획 사건 재판 도중 방청석의 아내에게 “여러 번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입회형무관이 급히 제지하는 모습을 어느 방청객이 몰래 찍은 사진이다.
사모님의 따뜻한 환대와 잠깐 뵈도 느껴지는 두 분 사이의 깊은 정까지도…
아마도 리영희 선생님의 위업의 반은 사모님의 공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렸을 정도로 말이다.
수 차례 투옥을 포함,
정확한 것(올바른 것 보다는 정확한 것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을 알리기 위해
늘 권력에 맞서야 했던 꼬장꼬장하고 곧이곧대로인…마음으로야 늘 말리고 싶으셨을 남편의 곁을 지키며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이 너무나 고되고 힘든 일이었겠지만
책 속에 구구절절한 아내에게 보내는 리영희 선생님의 옥중 편지를 읽다보면
나 역시 한 여자로서…세상에 이보다 부러운 여인는 없을 정도다.
모 모임에서 강화도로 놀러갔을 때에도 선생님은 손수 사모님의 발을 씻겨 주시며
나와 살아줘서 참 고맙다~고 하셨다는 에피소드를 들었는데…(감동의 쓰나미)
선생님에게서 흔히 예술가나 창작자들에게서 보이는 그늘이나 비틀림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도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사모님과의 그 깊은 부부지정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리영희 선생님은 이 사진이 너무 좋으시다며, 사진을 찾아 한 장 보내달라고 사무실로 전화를 주셨었다~ 그 살가움이라니…T_T
매일 아침 시작되는 오늘처럼…
새로운 출발선에서 선 나.
처음 보고 전율을 느꼈던 선생님의 저 교정지를
조금씩 게을러지고 자신없어하는 내 몸과 마음에게 보여줘본다.
효과가 아주 좋다.
할 일과 갈 데, 떠오르는 생각과 만날 사람이 모두 다 너무 많은 어수선한 나이지만
one and only…결국 한 길로 수렴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언젠가 나에게도 다시 한 번
저런 교정지가 주어지기를 바라며.

영광이라는 표현 별로라~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기다림 (Waiting)
하 진 저/김연수 역 | 시공사 | 2007년 08월
중국에서 태어나 석사까지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간 마흔 셋의 중국인 영문학자가 영어로 낸 소설이다. 제 2외국어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김연수씨의 번역도 너무 좋다. 워낙에 본인이 문장을 잘 쓰시는 분이지만, 번역자로도 훌륭해서 전혀 이질감 없이 마치 한국어로 쓰여진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중국인이 영어로 쓴 소설을, 한국 소설가의 번역으로 읽는다? 많은 할 일 다 제쳐두고, 태평양을 두 번이나 넘는 복잡한 과정을 돌아 비로소 나에게 온 문장들 속에 정신 없이 빠져들었던 며칠이었다. 눈물도 나고, 찔리기도 했다.
문화 혁명 시기, 군의관 린의 깡마르고 못생긴 아내 수위는 그에게 집이다.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멋드러진 문장들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고작 1년에 한 번씩 받는 열 이틀의 여름 휴가를 빌어 집으로 왔을 때, 수위가 내놓는 음식들을 보면 된다. 달달한 잡곡죽과 몇 시간이 지나도 냄새가 넘어오는 부추달걀 튀김, 마음이 편안해지며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 참기름과 으깬 마늘로 양념한 줄기콩…그가 오후에 뜬금없이 내일 아침 부모님 산소에 가야겠다고 한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난 린이 솥의 나무뚜껑 위에 놓인 대바구니 안에서 발견한 것은 수위가 새벽같이 만들어 놓고 나간 네 종류의 음식이다. 생선튀김, 돼지고깃국, 토마토 달걀볶음, 껍질을 벗기고 백설탕을 뿌려 찐 토란. 이혼을 염두에 둔 의식인지도 모르는 채, 느닷없는 남편의 말에 당황한 수위가 없는 살림의 비상금 쪼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밤늦도록 재료를 구해 마련한 음식이다. 생전에 그의 부모님이 무척이나 좋아하시던. 그러니 그가 머나 먼 타지에서 군의관 생활을 하며 애인과 정을 나누는 동안, 내내 그의 병든 어머니와 아버지를 돌보고 지킨 것은 수위라는 것을 새삼 이러쿵 저러쿵 강조할 필요도 없다.
점점 쭈구렁망탱이 노처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린에게 매달리는, 한 때 매력적인 아가씨였던 만나는 린의 애인이다. 무려 18년 간 사랑하되 이루어질 수 없는, 엄격한 군의 규정 때문에 병원 밖에서는 함께 있을 수도 없어 그야말로 ‘生’각시로 늙어가는 린의 애인이다. 목매달며 결혼하자는 심약한 애인도 있었고, 이혼한 고위 정치위원의 처가 될 뻔도 했지만 시시때때로 우리를 덮치는 생의 아이러니 때문에 이도 저도 못 이뤄 이제는 자의반 타의반 어쩔 수 없이 유부남 린이 이혼하기만을 기다리는 만나의 절박함을 구구절절이 표현할 필요는 없다. 처음으로 이혼하러 여름 휴가를 빌어 고향에 내려간 린을 가슴 뛰게 기다리다 매점에서 싸게 파는 공단 이불보를 보고 너무도 기뻐 한 달 월급의 반이 넘는 40위안에 가까운 돈을 주고 덜컥 사 버렸을 때, 바로 그것이 만나의 애끓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이불보에 수 놓인 ‘잊기 어려운 밤(難忘之夜)’이라는 글자는 잊기 어려운 밤을 남기고 간 한 남자를 기다리는 세상 모든 여자들의 마음이다. 커다란 진주를 품은 불사조 같은 상상 속의 동물들이 수놓아진, 결코 사용될 일 없었던 그 아름다운 공단 이불보가 바로 만나의 지난 18년이다.
기다림이란 무엇일까? 애인을 두고 매년 부인과 이혼 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매번 실패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자신의 인생이 바뀌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우유부단한 한 남자를 기다리는 두 여인의 기다림의 세월은 분분히 꽃잎 지는 20년의 세월을 향해 달려간다.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고 있지만, 시간의 힘은 모른다. 세월이 이 기다림을 비틀어 어떤 기괴한 모양으로 만드는지. 기다림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한 시간의 강에서 자란 돌연변이 괴물같은 모양새로 이들 앞에 입을 벌리고 있다. 기다려야만 했던 그 간절한 이유도 이 세월의 괴물 앞에서는 고작 한 입거리 찬이다. 괴롭고 슬프고 아프고 행복하고 기뻤던 가슴 속 우주는 거대한 시간 속에서 한 점으로 지워져 간다. 심지어 불가항의 ‘운명’이라 생각했던 그것마저도.
시간이 흘러간다. 그 시간 속에 인생이 빚어진다. 고통스럽지만 웃을 수 있고, 행복하지만 눈물이 나는… 소설은 그 기나긴 생의 불연속면을 낱낱이 그려낸다. 오롯이 인물의 대사와 행동, 풍경의 묘사만으로. 섣부른 해석이나 그럴 듯한 아포리즘은 없다. 작가 개인의 목소리는 배제되어 있고, 어떤 인물의 내면 속으로 필요이상 더 깊이 들어가지도 않는다. 작가는 끝없는 상황의 관찰을 간결하고 소박한 흙빛 문장으로 퍼다 나른다. 그 속에서 삶과 인간의 심연이 서서히 그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드러낸다. 그렇지.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축축하게 젖은 이마, 깨문 입술보다 쓰라렸던 세월에 찢어진 가슴을 더 잘 표현해줄 수 있는 게 무얼까.
요즘 접하는 소설들마다 철학과 과학과 심리학과 뭐와 뭐의 퓨전인 경우가 많았다. 저 멀리 쿤데라부터 시작해 알랭 드 보통이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요즘 소설들 보면 작가인지 인물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튀어나와 일장 연설을 늘어놓거나 감상을 풀어놓는다. 그것대로의 깊은 맛과 세계가 있지만, 하 진이라는 작가의 이 소설에서 히치콕의 영화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반가움을 느꼈다. 영화에서만 가능한 시각적 방식으로만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던 히치콕처럼, 하진은 입체적 분석 대신 인물들이 하는 말과 엇갈린 행동들의 묘사에만 집중한다. 그것으로 서술로서는 전달되지 않는 인간 내면의 모순과 분열이, 그 비극성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장르에서나, 오롯이 그 장르에 천착한, 불순물이 첨가되지 않은 순도 100프로 정격의 경지에 이른 성취는 놀랍다. 토를 달거나 비교할 수 없다. 경외할 수 밖에 없다. 그 세계의 정수, 가장 깊은 곳에 이르렀으므로.
오지 않을 것을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아무리 머리로는 아닌 줄을 알아도, 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런데 놀랍게도 인생에서는 때로 그 오지 않을 것이 오고야 만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랬다.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진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이미 내게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절박함은 사라지고, 나는 이미 또 다른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탐욕도 아니고 찰나의 변덕도 아니다. 인생의 아이러니는 우리를 생각치 못했던 곳으로 끌고 들어간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 지는 가봐야 알겠다. 하지만 그 전에 생은 오늘 내 앞에 있다.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면,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림의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닐까? 기다린 것이 온 뒤에도, 혹은 오지 않은 뒤에도 결국 또 다시 우리 앞에 닥치는 것은 오늘일테니. 꼭두각시의 줄을 끊고 현재의 파도타기에 몸을 맡긴 자, 소설 속 겅위처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열대병 (Tropical Malady, 2004)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출연 :반롭 롬노이, 사크다 카에부아디, Udom Promma
이야기는 남양군도의 외딴 섬에 고립돼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서양 여자의 입체 누드사진을 들여다보는 한 젊은 병사의 심리에 대한 추측에서 시작됐다. 그 입체 누드사진은 현실보다도 더 생생한 환상을 그에게 보여줬을 거라면서, 나는 고립된 사람들에게 현실이 한순간 뒤흔들리면서 그보다 더 생생한 환상이 나타나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고 떠들어댔다. 제아무리 견고하다 해도 현실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므로.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감각이 바뀌면서 현실이 무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기 마련인데, 이를 두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모든 성인(聖人)들은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그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현실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경험한 그 다음 순간, 모든 성인들은 감각적 현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인지 깨닫게 된다. 현실이 감각적으로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덧없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 텐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더욱더 그 감각적인 생생함을 즐기게 되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 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최상의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42p
켕이 정글에서 보낸 그 밤도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이 아니었을까?
그 밤의 감각적 생생함을 저 멀리 화면 너머로나마 느낄 수 있어 강렬했던 영화 < 열대병>
삽입곡 คำในใจ (straight- kumnaijai) by fashion show.
November 24, 2006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나카지마 아츠시/다섯수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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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명(文名)은 생각처럼 쉽게 얻어지지 않았고 생활도 날로 궁핍해졌다.’
< 월기> 첫페이지의 이 마지막 문장에서부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
첫 페이지에 딱 여섯 문장 나오는데,
단지 그것만으로 한 재능많은 인간의 욕망과 자존심, 그로 인해 빚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흥망성쇠를
어쩌면 이렇게 간결하고도 똑 떨어지게 표현해 냈는가 말이다.
그렇게 책은 상세한 설명이나 묘사없이 대강의 줄거리 요약하듯이 툭툭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도스토예프스키씨가 썼으면 약 두 세 챕터의 분량에 해당할 내용이 한 문장으로 휙-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애써 노력하지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던 것이네.
이런 식으로 시시때때로 가슴 금즉하게 하면서 말이다.
건성건성 같기도 같고, 동양화의 여백의 미 같기도 한 문장들.
하지만, 호불호를 전혀 내색하지 않는 그 단정한 문장들이 묘사하는 인간의 모습이란 얼마나 골때린 것인지.
그 정점인 < 자>에 이르러, 공자의 제자인 자로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마치 중국 고전판 우디 알렌을 감상하는 기분.>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고,
나라의 질서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이 곧기가 대쪽같아 (=>유두리 제로) 오히려 스승의 걱정을 사는 자로
어쩐지 지성이나 마음의 수양에는 선천적 DNA가 결여되어 있어
거문고만 타도 대번에 ‘타는 사람의 게으르고 거친 심상을 이렇게 분명하게 비추어 보여주는 것도 드물 것’이라는 OTL스런 평가를 받는 자로.
이 말을 듣고 아연질색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몇 날 며칠 밥을 굶어가며
조용히 사색만 하다 얼굴이 해쓱해져서 다시 거문고를 타는 의지의 중국인, 자로.
스승은 아무 질책이 없으나, 불행히도 그것은 소리가 나아져서가 아니라 그토록 애쓰고 괴로워하는 자로를 보다 못한 스승의 배려였음을.. T_T
그것도 모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좋아라~ 하는 순진무구한 우리의 자로.
주로 이런 식으로 자로는 공자조차 다소 포기했을 정도로 제자들 중 공자의 사상을 가장 흡수 못하는 인물이다.
그래도 시시때때로 공자에게 대놓고 “이러니까 곤란합니다!!”라고 대들 수 있었던 것은,
학문이나 재능은 뒤질지 몰라도 유사시에 제일 먼저 스승을 위해 목숨을 던질 사람은 자신이라는 굳은 신념, 스승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다른 곳에서라면 어떤 경우라도 남의 밑에서 절대로 구속을 받지 않을 남자이고, 일낙천금의 쾌남아인 자로가 변변치 못한 제자로서 공자에게 시중을 들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사람들에게 기이하게 보였다. 사실 그는 공자 앞에 있을 때만은 복잡한 사색이나 중요한 판단은 일체 스승에게 맡긴 채 자신은 마음 푹 놓고 있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어머니 앞에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어머니가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자신도 스승 앞을 물러나와 생각해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마지막 중편 < 능>에 이르러 이 가볍고 유쾌했던 기분은 서서히 걷히고
이능, 소무, 사마천…’하늘은 역시 보고 있었다’의 감당하기 힘든 무게감과
도덕 윤리를 압도하는 괴상망측한 현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평생을 마음 졸이며 갈팡질팡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간들의 아노미 상태를 따라가며, 앞에서 웃은 거 다 토해내야 했다. >
역사는 없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일정 포션으로 역사의 한 켠을 차지하는 마이너리티 인간들이 있었다.
그들 또한 재능이나 충절, 간절한 염원 따위 가볍게 넘어서는, 인간의 뜻이 닿지 않는 생의 부조리에 시달렸더라.
멋모르고 낄낄거리며 시작했다, 뭔가 묵직한 것 하나 가슴에 얹은 기분으로 내려 놓은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