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교정지 – 리영희 선생님과의 잊을 수 없는 대화
Q : 임헌영 선생님의 역할이 크셨을 것 같은데요.
리영희 선생님 : 임헌영 씨는 뛰어난 문학비평가이면서 해방 후 한국 현대사를 굉장히 연구하고 있어요. 내가 살아온 기간보다는 훨씬 짧지만 대개 내가 문제로서 취급했던 일들을 잘 꿰뚫고 있는 사람이예요. 문제제시가 아주 좋았지. 임헌영 씨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어요.
그러면서 대담만 가지고는 부족한 것이 있어요. 구술한 것 중에 문장이 안 되거나 빠진 내용들이 있었지. 문장을 고치고 빠진 부분들을 질문과 관계없이 집어 넣었는데, 필요한 것을 전부 고쳐서 충실하게 만드는 데 1년이 걸리더라구. 쓰지 못하는 손을 가지고 아주 고생을 했지. 하루 종일 손을 들썩이며 써도 200자 원고지에 한 10장. 원고지 두 세 장을 쓰면 손가락이 다 구부러지지. 구술한 것이나 남이 해 준 것 보다 내가 수정하고 고쳐 넣은 것이 훨씬 많았어. 그러니까 오래 걸렸지.
우리 집사람은 그만 두자고 했어. 원고 빨리 써달라고 재촉을 받아 밤을 세우다 뇌출혈이 왔는데, 또 이걸 붙잡고 있으니까 집어 치우라고 했지. (웃음)
Q: 그냥 대화해서 나온 책이 아니네요
리영희 선생님 : 아니야. 절대 아니야. 구술만 해서는 책이 되지 않더라구. 나는 문장의 아름다움을 굉장히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문장의 미라는 것은 고치고 또 고치고 하면서 만들어지는 건데, 기계로 타다닥 쳐버리니까 안 되겠더라구. 얼마나 다듬었는지 몰라.
Q: 그런데 꼭 정말 대화를 듣는 것처럼 쉽고 편하게 느껴져서, 역시 대담을 글로 옮기니 읽기가 쉽구나 하는 반응들이 많이 있어요.
리영희 선생님 : 그걸 쉽게 마치 정말로 대화로 한 것처럼 문장을 만든 거야. 읽는 독자를 상상을 하면서 읽기 편하게 대화를 하는 것처럼 만든 거지. 나는 과거에 그런 문장을 많이 써왔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이럴 때 어떻게 가볍게, 즐겁게 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서 그렇게 문장을 만든 거예요. 대담으로 누가 책을 만들더라도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렇게 쉽게 느껴지는 책이 되지 않아요.
선생님을 찾아뵈었던 2006년 3월.
새로운 것들은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데,
Web 2.0은 벌써 난리라는데
시간은 없고, 몸은 지치고, 아무도 안 도와줘서 울고 싶고,
무엇보다 스스로 체감하는 내 능력의 한계가 분명해
좀비처럼 밤과 낮을 헤매며 책을 쓰는 건지
저주받은 미로를 헤매는 건지 모를 제자리돌기를 하고 있었던 때
선생님의 저 말씀,
뇌출혈로 마비된 손을 들썩이며 하루 종일 써도 하루에 원고지 10장….
몽롱했던 내 정신에 누군가 찬물 한 바가지 끼얹고 가는 기분이었달까?
부끄러웠고
무엇이 노력인지 어디까지를 한계라 말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었다.
그 날은 나에게는 무언가 달라진 날이었다.

<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 한길사 (2005.3)
< 전환시대의 논리>의 저자, 사상의 은사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 한국 최고의 지성, 시대를 움직인 지식인
그 방면으론 머리가 텅 빈 나, 선생님 이름앞에 붙는 거창한 수식만으로도 기가 죽었었지만
멀리서 왔다며 고생했다며…너무나 자상하고 해맑은 모습에 감동받았고
거창한 것은 거창하게 사소한 것은 사소하게…모든 것을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작은 것 하나 하나 수치와 사례로 말씀하시고, 수치를 물어보시는 몸에 배인 실증적인 대화법은 물론
(대충 물어보시는 거겠지 하며 앞 뒤 안 맞는 숫자를 대면 날카롭게 모순을 지적하셔 흠칫할 정도로…)
70이 넘으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개방적이신 태도…
검색이니 지식인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시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시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고 감동받았었다.

< 한겨레 신문> 창간기념 북한 취재기자단 방북기획 사건 재판 도중 방청석의 아내에게 “여러 번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입회형무관이 급히 제지하는 모습을 어느 방청객이 몰래 찍은 사진이다.
사모님의 따뜻한 환대와 잠깐 뵈도 느껴지는 두 분 사이의 깊은 정까지도…
아마도 리영희 선생님의 위업의 반은 사모님의 공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렸을 정도로 말이다.
수 차례 투옥을 포함,
정확한 것(올바른 것 보다는 정확한 것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을 알리기 위해
늘 권력에 맞서야 했던 꼬장꼬장하고 곧이곧대로인…마음으로야 늘 말리고 싶으셨을 남편의 곁을 지키며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이 너무나 고되고 힘든 일이었겠지만
책 속에 구구절절한 아내에게 보내는 리영희 선생님의 옥중 편지를 읽다보면
나 역시 한 여자로서…세상에 이보다 부러운 여인는 없을 정도다.
모 모임에서 강화도로 놀러갔을 때에도 선생님은 손수 사모님의 발을 씻겨 주시며
나와 살아줘서 참 고맙다~고 하셨다는 에피소드를 들었는데…(감동의 쓰나미)
선생님에게서 흔히 예술가나 창작자들에게서 보이는 그늘이나 비틀림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도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사모님과의 그 깊은 부부지정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리영희 선생님은 이 사진이 너무 좋으시다며, 사진을 찾아 한 장 보내달라고 사무실로 전화를 주셨었다~ 그 살가움이라니…T_T
매일 아침 시작되는 오늘처럼…
새로운 출발선에서 선 나.
처음 보고 전율을 느꼈던 선생님의 저 교정지를
조금씩 게을러지고 자신없어하는 내 몸과 마음에게 보여줘본다.
효과가 아주 좋다.
할 일과 갈 데, 떠오르는 생각과 만날 사람이 모두 다 너무 많은 어수선한 나이지만
one and only…결국 한 길로 수렴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언젠가 나에게도 다시 한 번
저런 교정지가 주어지기를 바라며.

영광이라는 표현 별로라~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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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순 said,
February 8, 2008 @ 5:19 pm
막연하게 훌륭한 분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보여주는군요.
전달자로서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대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