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na Krall – 내 주량은 너 한 박스

다이애나 크롤은 내가 제일 처음 좋아하게 된 여자 재즈 가수야. 난 빌리 홀리데이나 사라본 같은 사람들도 잘 몰랐어.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좋은 줄은 몰랐지. 다이애나 크롤은 처음으로 여자가 부른 재즈가 좋다는 걸 알게 해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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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 3개를 들었어. 표지를 보고 노래 좀 하고 미모로 승부하는 하늘하늘한 금발머리 미녀 가수 정도로만 생각했지. 자기가 부른 노래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 중에서도 제일 안 어울리는 ‘I’ve got you under my skin‘이 제일 좋았어. 난 귀에 들린 소리가 아니라 눈에 보인 그림에 속고 있었던 거야.

I’d sacrifice anything come what might
For the sake of having you near
In spite of a warning voice that comes in the night
And repeats in my ears

Don’t you know you fool, you never can win
Use your mentality, step up to reality.

시체놀이하고 있는 나른한 봄날 일요일 오후에 방안 가득 흐르는 그런 가사들은 햇볕에 뒤섞여 정신을 몽롱하게 했어. 한참을 듣다 보면 볕은 가시고, 창은 어두워졌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보면, 슬퍼하고 있었던가? 나 역시도 늘 그렇게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던 탓이야.

그녀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난 달콤한 미녀 재즈 싱어와의 조우를 기대했어. 예술의 전당은 나와 같은 기대를 가진 사람들로 꽉 차 있었지. 공짜로 얻은 R석, 분에 넘치는 앞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렸어. 마침내 그녀가 등장했지. 저런. 바지였어. 그녀는 전혀 전혀 금발 미녀가 아니었어. 가창력을 자랑하듯 질러대지도 않았고, 기교를 과시하며 꺾지도 않았어. 무심하게 건반을 두드리며, 묵직하게 가라앉은 허스키한 보이스로 차가운 포스를 뿜어냈어. 가끔씩 관객을 바라볼 때 그 파란 눈은 독수리처럼 날카로웠어. 내 옆에 앉은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속삭였어. “강한 여자야…” 난 질투가 났던 것 같아.

타협하거나 알랑거릴 여지가 안 보이는 여자였어. 세션이나 무대 메이킹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연주하고 공연을 이끌어 가는 독립된 존재. 그때부터 그녀의 노래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르게 들렸어.

…….

몇 년 전부터 겨울이 되면 이 노래를 들어. 왜 그런 노래 있잖아. 처음 듣는 순간부터 좋았고, 다시 들어도 질리지 않고 더욱 좋아지는 노래. 수 없이 들었는데도, 신청곡을 틀어 주는 바 같은 데 가면 또 다시 메모지에 제목을 적게 되는 노래. 그런데, 잘 안 틀어줘. 틀어준다 해도 분위기 깬다고 사람들 싫어하고 금방 짤리고ㅋㅋ 그래서 술 취해 집에 오는 길에 혼자서 흥얼거리고 있어. 마구잡이로 개사를 해 가며. 그래도 그때 내 마음은 노래와 비슷해서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틀리지는 않을 거야.

A Case of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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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주인공 같은 너를 그려…푸른 TV 불빛을 받으며…두 번씩 그리지. 너는 내 피 속에 성스러운 와인처럼 흘러. 너무 쓰고, 너무 달아.
난 너를 한 박스라도 마실 수 있어. 그리고도 비틀거리지 않고 내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어….

난 너를 한 박스라도 마실 수 있어..달링.

한 호흡 뒤에 이 ‘~달링’하는 부분이 너무 좋아. 들을 때마다.

누구나 한 번쯤 한 박스씩 너를 마시지 않아? 그리고 두 발로 버티고 꼿꼿이 서. 쓰러지지 않고 이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 오늘도 집에 잘 왔어, 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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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코멘트 »

  1. 프리버즈 said,

    December 17, 2008 @ 10:14 am

    저는 Live in Paris 앨범 젤 좋아해요.

  2. 마루날 said,

    December 17, 2008 @ 11:38 am

    요즘은 예전과 달리 연말이 와도 분위기도 안나고 그러는데요.
    다이아나 캐롤의 크리스마스 앨범 들으면 분위기가 납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

  3. naani318 said,

    December 18, 2008 @ 1:46 am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무대감독하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비디오로
    프로젝터로 쏘아주는 콘서트 장면을 보았더랬지. 나도 그냥 금발머리 미녀가수인줄만 알았는데, 그 차갑고 강인하고 냉정한 모습을 보고는 놀랬더랬어.
    그 다음부터 그런 재즈를 ‘백인 재즈’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뭔가 온통 촉촉한 가슴와 터질듯한 뜨거움과 열정으로 가득한 흑인재즈와는
    다른 차갑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바로크적인? 재즈라는 뜻으로 말야.

    오늘 태경이 형을 만나고 왔어.
    연극이 십 팔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서 형과 나를 만나게 해 주었어.
    토욜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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