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나카지마 아츠시/다섯수레 출판사
=============================================
'그러나 문명(文名)은 생각처럼 쉽게 얻어지지 않았고 생활도 날로 궁핍해졌다.'
<산월기> 첫페이지의 이 마지막 문장에서부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첫 페이지에 딱 여섯 문장 나오는데,
단지 그것만으로 한 재능많은 인간의 욕망과 자존심, 그로 인해 빚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흥망성쇠를
어쩌면 이렇게 간결하고도 똑 떨어지게 표현해 냈는가 말이다.
그렇게 책은 상세한 설명이나 묘사없이 대강의 줄거리 요약하듯이 툭툭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도스토예프스키씨가 썼으면 약 두 세 챕터의 분량에 해당할 내용이 한 문장으로 휙-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애써 노력하지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던 것이네.
이런 식으로 시시때때로 가슴 금즉하게 하면서 말이다.
건성건성 같기도 같고, 동양화의 여백의 미 같기도 한 문장들.
하지만, 호불호를 전혀 내색하지 않는 그 단정한 문장들이 묘사하는 인간의 모습이란 얼마나 골때린 것인지.
그 정점인 <제자>에 이르러, 공자의 제자인 자로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마치 중국 고전판 우디 알렌을 감상하는 기분.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고,
나라의 질서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이 곧기가 대쪽같아 (=>유두리 제로) 오히려 스승의 걱정을 사는 자로
어쩐지 지성이나 마음의 수양에는 선천적 DNA가 결여되어 있어
거문고만 타도 대번에 '타는 사람의 게으르고 거친 심상을 이렇게 분명하게 비추어 보여주는 것도 드물 것'이라는 OTL스런 평가를 받는 자로.
이 말을 듣고 아연질색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몇 날 며칠 밥을 굶어가며
조용히 사색만 하다 얼굴이 해쓱해져서 다시 거문고를 타는 의지의 중국인, 자로.
스승은 아무 질책이 없으나, 불행히도 그것은 소리가 나아져서가 아니라 그토록 애쓰고 괴로워하는 자로를 보다 못한 스승의 배려였음을.. T_T
그것도 모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좋아라~ 하는 순진무구한 우리의 자로.
주로 이런 식으로 자로는 공자조차 다소 포기했을 정도로 제자들 중 공자의 사상을 가장 흡수 못하는 인물이다.
그래도 시시때때로 공자에게 대놓고 "이러니까 곤란합니다!!"라고 대들 수 있었던 것은,
학문이나 재능은 뒤질지 몰라도 유사시에 제일 먼저 스승을 위해 목숨을 던질 사람은 자신이라는 굳은 신념, 스승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다른 곳에서라면 어떤 경우라도 남의 밑에서 절대로 구속을 받지 않을 남자이고, 일낙천금의 쾌남아인 자로가 변변치 못한 제자로서 공자에게 시중을 들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사람들에게 기이하게 보였다. 사실 그는 공자 앞에 있을 때만은 복잡한 사색이나 중요한 판단은 일체 스승에게 맡긴 채 자신은 마음 푹 놓고 있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어머니 앞에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어머니가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자신도 스승 앞을 물러나와 생각해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마지막 중편 <이능>에 이르러 이 가볍고 유쾌했던 기분은 서서히 걷히고
이능, 소무, 사마천...'하늘은 역시 보고 있었다'의 감당하기 힘든 무게감과
도덕 윤리를 압도하는 괴상망측한 현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평생을 마음 졸이며 갈팡질팡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간들의 아노미 상태를 따라가며, 앞에서 웃은 거 다 토해내야 했다.
역사는 없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일정 포션으로 역사의 한 켠을 차지하는 마이너리티 인간들이 있었다.
그들 또한 재능이나 충절, 간절한 염원 따위 가볍게 넘어서는, 인간의 뜻이 닿지 않는 생의 부조리에 시달렸더라.
멋모르고 낄낄거리며 시작했다, 뭔가 묵직한 것 하나 가슴에 얹은 기분으로 내려 놓은 책.
327
ENTRIES AND 15880
COMMENTS/ Since 2003. 4.18 


